몸이 아플 때만큼 몸을 의식하는 때는 또 없다. 아플 때만큼 고독할 때도 없다. 고통은 타인과 나눌 수도 없고 타인을 이해시킬 수도 없는 어떤 것이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와 씨름하는 실존의 순간 그 자체가 된다. 만 하루 동안 진통제를 허용치보다 더 많이 먹고 나서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날, <작가라는 사람>에 실린 올리버 색스의 인터뷰를 읽다가 고통이 이렇게까지 낭만적일 일인가 싶어 그만 웃고 말았다. “우리의 몸도 건강할 때는 평범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고장이 나야,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 뒤에 숨은 어마어마한 복잡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를 인터뷰한 엘리너 와크텔은 묻는다. “그러니까 어떤 것의 부재를 보고 나서야 그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거군요.” 신경학자이자 작가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깨어남>을 비롯한 책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부재는 존재로부터 비롯한다. 세상을 감각하는 방법 자체가 그렇다. 올리버 색스는 약간 짓궂게 “<나는 침대에서 다리를 주웠다>는 가능하면 척추 마취를 받은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허리 아래의 감각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사라진다’는 감각 속에서. (비내리는 날 아침의 요통과 주기적인 치통 정도가 있을 뿐)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에게 부재하는 감각에 대한 상상은 어딘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올리버 색스가 쓴 글을 읽다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와크텔의 생각 역시 그렇다. “그래서 육체적 문제를 낭만화한다는 비난을 받는군요.”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그런 점은 글을 낳은 사고방식 그 자체다. 장애를 새로운 표준상태로 생각하고 그 상태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고, 올리버 색스는 이제 사회화를 시작하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인내심을 갖고 환자들을 대한다.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서 “내가 전세계에서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불리고, 2015년에는 ‘캐나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도 선정된 적이 있다는 엘리너 와크텔의 인터뷰집 두권 <작가라는 사람1, 2>는 뛰어난 단편소설을 쓰는 윌리엄 트레버,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에드워드 사이드, ‘마술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여성 작가이자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 이사벨 아옌데를 비롯한 작가들과의 대화를 싣고 있다. 창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창작자란 대단하구나 하는 새삼스런 감탄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