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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기억하리라, 이 모든 것을
한유주(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04-06

나는 주로 새벽에 밀린 집안일을 해치운다. 바닥의 먼지를 닦거나 수건을 개는 동안의 적막이 싫어서 대개 노트북으로 전날 저녁의 뉴스를 틀어둔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어떤 목소리는 흘려듣게 된다. 탄핵정국과 관련된 뉴스들도 대개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가끔, 나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노트북 화면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어떤 소리가 들려서다.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화면만 바라볼 뿐이다. 그때 화면에는 보통 위에서 내려다본 배와 바다가 나타나 있다. 자막 영역에는 ‘팽목항’이나 ‘7시간’ 등의 단어가 지나가고 있다. 몇번이고 본 장면이다. 그러나 늘 똑바로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소리가 헬리콥터의 소음이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늦게야 인지하게 되었다.

물론 헬리콥터 소음이 세월호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만 들리지는 않는다. 고속도로 귀경길 정체나 강의 녹조류 관련 뉴스를 보도할 때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작은 노트북 화면을 메운 영상이 배나 바다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때에도, 나는 어김없이 배와 바다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이 지나가고 다음 뉴스가 이어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으고 수건들을 차곡차곡 접으면서 이처럼 하찮지만 소중한 일상을 잃어버린 상태를 감히 상상하고, 곧 실패한다.

그리고 세월호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 인양과 맞물려 전직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표현을 생각했다. 나는 가끔 내가 굳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했고, 법과 같은 언어로 밝히기 힘든 애매한 것들을 소설로 쓸 수 있기 때문일 거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주 전에 있었던 헌법재판소 판결전문을 읽을 때는 법의 언어로만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라는 접속부사가 어떤 서사적 장치 못지않게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 진실이 인양되었으니 그것을 명확하고 빛나는 언어로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말들은 잊히지도, 다시 가라앉지도, 사라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이든 노트북이든 화면에서 헬리콥터 소음이 들려오면 반사적으로 3년 전의 그날을 생각할 것이고, 소리가 들려오지 않더라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내게 민주시민사회의 구성원이 할 수 있는 일들의 가장 작은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