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어렸을 때 사진을 몰아서 보게 되었다. 집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온천에 놀러가서 찍은 것도 있었다. 그러다 찍은 장소와 시간은 달라도 언제나 똑같은 책이 손에 들려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다이나믹 콩콩에서 출간된 <괴수군단 대백과>였다.
다이나믹 콩콩은 당대의 해적판 전문 레이블이다. 일본 원작을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작화와 대사를 엉성하게 덧칠해서 출판했다. 손에 꼭 들어오는 판형에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내 세대 독자들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다이나믹 콩콩의 대백과 시리즈는 우리 세대의 위키피디아였다. 다이나믹 콩콩의코믹스 시리즈는 우리 세대의 마블이었다. 낮에는 <용소야>와 <권법소년>과 <프로레슬러 대장군>과 <쿤타맨>을 읽고 밤에는 <괴수군단 대백과>와 <로보트군단 대백과>를 읽었다. 친구들과 용소야의 경사기도권을 연마하다가 동네 가로수에 손가락이 접질려 다치기를 수십회. 통배권을 연습하다가 거실에서 수박을 산산조각내먹고 혼이 나 정말 서럽게 울기도 했다.
어차피 일본 원작을 가져다 쓴 것이었기 때문에 가공의 작가를 만들어내 그들이 다 그리고 쓴 것처럼 표기했는데, 그래서 나는 전성기와 성운아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슈퍼 천재라고 생각하고 자랐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작화와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나도 저렇게 훌륭한 작가가 되어야지.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다 일본 원작의 해적판이고 내 유년 시절이 전부 거대한 뻥에 기반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을 받았을 법도 한데 그리 억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시절의 내게 다이나믹 콩콩의 책들보다 즐거운 건 없었다. 다이나믹 콩콩은 내게 거대한 세계를 가져다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54년 초대 고질라의 신장이 50m라는 건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지식이지만, 어찌됐든 나는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소중하다(심지어 나는 이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무척 깨끗하다). 다이나믹 콩콩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기로 하고.
<괴수군단 대백과>는 일본의 <고질라> 시리즈를 소개한 책이었다. 철권 친미가 용소야, 초인 킨타맨이 쿤타맨으로 둔갑했듯이 고질라는 용가리로 바뀌었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질라는 어린 시절의 내게 절대적인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첫장을 펴 헤이세이 고질라(쇼와 시대에 만들어진 <고질라> 시리즈와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기법. 84년작부터 헤이세이 고질라로, 2000년대부터는 밀레니엄 시리즈로 구분한다)의 사진을 본 순간 고질라의 포로가 되었다. 직립보행을 하는 공룡인데 방사능 화염을 내뿜고 완벽한 부성애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얼마나 강한지 무려 29개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동안 인류는 자신들의 힘으로 이 괴수를 물리쳐본 일이 한번밖에 없었다. 고질라를 퇴치한 건 늘 다른 괴수였다. 혹은 고질라 스스로 너무 지쳐서 바다로 돌아갔다. 1954년 첫 번째 <고질라> 영화에서 ‘옥시전 디스트로이어’로 고질라를 녹여 버린 일 이후로는 인류가 이긴 적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다. 30번째 <고질라> 시리즈이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가 연출한 <신 고질라>는 첫 번째 <고질라> 영화 이후 처음으로 인류가 승리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고질라> 시리즈는 괴수영화일까, 재난영화일까. 전자는 파괴와 결투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후자는 공공의 재난 상황에 맞서 구성원들이 지혜와 용기를 짜내어 공동체를 위기로부터 구제해내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점에서 볼 때 54년의 초대 <고질라>는 재난영화였다. 이후 <고지라 대 모스라> <고지라 대 킹기도라> <고지라 대 스페이스고지라>와 같은 쇼와, 헤이세이 시리즈들은 괴수영화였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질라>는 괴수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되 어디까지나 재난영화의 성격을 더 많이 지닌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고질라의 달라진 생김새가 아니라 관료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신 고질라>는 관료 시스템을 무턱대고 무능한 구체제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 대신 기존 시스템은 체계적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재난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힘을 모은다면 얼마든지 이러한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는 논조를 드러낸다. 이 젊고 재능 있는 인재들이 직급과 나이에 상관없이 지혜를 모으고 이것이 기존 체제와 협력하면서 끝내 고질라라는 이름의 유례없는 재난 상황을 해결해내는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작품 세계에서 시스템과 개인이 늘 극단적으로 대립해왔던 것을 상기해보면 상당히 유의미한 입장의 변화라 할 만하다.
고질라의 외관은 상당히 험악해졌다. 이전까지의 시리즈에서 가장 흉악하고 악마 같은 모습으로 거론되었던 2001년 GMK판보다 훨씬 끔찍한 수준이다. 극중에서 네 차례의 변이 과정을 겪는다는 것도 특이한 부분이다. <신 고질라>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안노 히데아키가 실사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아니라, 고질라를 특수촬영 기법으로 보여줄 것이냐 CG로 보여줄 것이냐의 문제였다. 오래된 팬들은 전자를 원했고 새로운 관객은 당연히 후자일 것이라 낙관했다.
결과적으로 <신 고질라>는 기존 시리즈들처럼 배우가 슈트를 입고 연기하거나 애니매트릭스 기법으로 촬영하여 일부 CG를 활용하는 방법 대신, 100% CG로 고질라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동시에 특수촬영 기법으로 촬영한 것과 유사한 질감을 내도록 CG 고질라의 방향성을 설정했다. 그 결과 <신 고질라>의 고질라는 CG를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느끼는 관객에게 꽤나 이질적으로 보인다. CG로 만들어진 할리우드의 레전더리 고질라(일본의 쇼와, 헤이세이, 밀레니엄 고질라처럼 할리우드의 고질라는 제작사의 이름을 따 레전더리 고질라로 불린다)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국내에서 <신 고질라>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도 역시 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표현 방식인데, 나는 새로운 기술을 중심에 두면서도 기존 일본 특수촬영물의 전통을 껴안았다는 점에서 안노 히데아키의 방향성에 찬성하는 편이다. 이는 새로운 세대가 구체제와 화해하며 재난을 해결해낸다는 본연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신 고질라>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건 아니나 다를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다. 실제 에반게리온의 스코어들이 많은 장면에서 들려온다. 주인공들이 총리 관저 2층에 대책본부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상황에 반전을 가져오는 대목에서는 에반게리온의 네르프 스코어가 연주되면서 문을 열고 덜컥 미사토가 들어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에서 고질라를 끝내 퇴치해내는 야시오리 작전은 에반게리온의 야시마 작전을 정확히 연상시킨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작전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노력이 모여 체계적으로 실행되고 끝내 공동체를 구제해내는 대목에서는 “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못했나”라는 마음에 울컥하기도 했다.
<신 고질라>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에반게리온의 세 번째 극장판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에 화가 나 있었지만 이런 결과물이라면 납득할 만하다. <신 고질라>는 54년 초대 <고질라> 이후 다른 시리즈를 전부 논외로 돌려버릴 만한 완성도와 집중력으로 본연의 정체성을 정리해낸 최고의 작품이다.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 방향으로 시리즈가 지속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