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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미소를 띠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노덕(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03-23

엊그저께는 공중파에서 실시간 추격전을 보게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카체이싱이었다. 댓글란에선 서울판 <매드맥스>라는 둥, 사람들은(나를 포함하여) 전 대통령의 퇴거 장면을 본격적으로 ‘관람’했다. 많은 방송국 중계차량의 선두엔 청와대에서 출발한 에쿠스가 달리고 있었고 몇번의 신호위반 끝에 반포대교쯤에서 추격에 실패한 방송국 차량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삼성동 카메라로 화면을 옮겼다. 내심 기대하는 장면이었다. 박근혜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대통령으로부터 탄핵 이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내가 예상한 1안은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간다’였다. 여태 보여준 캐릭터에 의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2안은 ‘굳은 표정으로 간단한 담화문을 발표한 후 들어간다’였다. 상식적으로 나와야 할 담화문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담화문 발표 현장이었다. 거기까지가 내 상식이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게 내 상식은 틀렸다.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한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추후에 나온 얼굴인식 프로그램이 분석한 박근혜의 감정은 ‘행복’이라고 알려졌다. 이것은 내가 목격한 가장 극단적인 감정의 비논리적 표출이다.

<연애의 온도> 초고를 쓸 당시 한동안 벽에 부딪힌 적이 있다. 논리적 전개로 가면 갈수록 ‘재미’가 떨어지는 게 그 이유였다. 슬프면 울고, 분하면 화내고, 그런 식으로는 멜로가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취업에 떨어졌다는 글을 읽었다. 이젠 더이상 물러설 데도 없는데… 반복되는 실패. 막상 떨어지고 보니 어이가 없어 눈물도 안 나고 웃음이 나온다는 글이었다.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감정은 논리가 아니다. 사람은 모순된 존재이고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슬프다고 우는 것만은 아니며 웃는다고 다 기쁜 것도 아닌 거다. 때론 웃음이 표현하는 슬픔이 더 깊다. 눈물이 흐르는 기쁨의 가치는 모두가 알 것이다. 관습을 떠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은 우리에게 그 감정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박근혜의 미소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지자들을 외면하면 동시에 현 상황에 대해 회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시한다는 것은 비겁이 동반되는 자세다. 최소한 자신의 기준에서 비겁한 인상을 주기 싫다는 태도라면 이해가 된다.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 또한 자신은 당당하고 억울하며 언젠가 이 모든 거짓이 밝혀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 미소는 ‘자존심’에가장 가까운 표현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비논리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나타난다. 주관적이면 주관적일수록, 객관적 시선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자기만의 논리로 인해 생겨난다.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는 사람일수록 상식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예의가 바른 것과 같다.

탄핵 후 내게 보여준 그녀의 첫 미소는, 그래서 그녀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고립되어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최소한의 자기 객관화도 되지 않아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도. 스스로가 얼마나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알고나 있을까? 청와대에서 나왔듯이 언젠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밖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때는 우리가 울 때 같이 울고, 우리가 웃을 때 같이 웃을 수도 있을 텐데. 글쎄.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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