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는 동계 스포츠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 <백은의 잭>은 스키장에 폭탄이 묻혀 있다는 협박 메일로부터 사건이 시작되고, <질풍론도>에선 스키와 스노보드 추격전이 극의 하이라이트를 차지한다. <아름다운 인간>은 운동선수들의 도핑을 소재로 하고, <마구>는 한 고등학생 천재투수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꿈은 토리노를 달리고>는 작가의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관전기로, 남다른 스포츠 사랑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이다. 실은 소설의 탈을 쓴 에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으로 변해버린 고양이 유메키치가 주인공. 그의 집사인 ‘아저씨’는 “사기에 가까운 소설을 쓰며 생계를 이어가는” 작가로, 곧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을 가리킨다. “일본에선 동계올림픽의 인기가 낮으니까 하계올림픽보다 출전이 어렵진 않을 거”란 엉뚱한 생각에 떠밀려 유메키치는 국가대표에 도전하지만 결국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대신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토리노로 떠나기로 한다. 둘의 여정에는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출판사 편집자 구로코(黑衣)가 함께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계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식견은 바이애슬론, 루지 등 생소한 종목에까지 두루 뻗어 있다. 경기 방식, 일본 선수들의 실력을 ‘스알못’ 고양이에게 수다 떨듯 늘어놓는다. 컬링을 하다 ‘자기 혼자 얼음에서 구르는’ 바람에 앞니와 코뼈가 깨졌던 일, 스키점프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경험 등 작가의 웃지 못할 사연들도 함께 담긴다. 추리소설의 비장함에 가려져 있던 작가의 유머감각은 곳곳에서 빛난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으러 오는 이들이 ‘불가사의’하다며 “이런 아저씨의 사인이 왜 필요할까. 글씨도 무지하게 못 쓰는데”라면서 고양이의 입을 빌려 스스로를 ‘디스’하기도 하고, “고양이에게 여권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소설이니까 괜찮겠죠”라며 독자와 저자 사이, 제4의 벽도 가볍게 뛰어넘는다. 일본 국민의 무관심과 정부의 스포츠 인재 육성 사업의 맹점을 비판하기도 하고, 올림픽만이 전할 수 있는 뭉클한 성취감을 생생한 묘사로 전달하기도 한다.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모두 녹아 선수들은 플라스틱으로 된 경기장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CG로 스키를 타는 엉뚱한 블랙코미디, <2056년 쿨림픽>이 함께 수록돼 있다.
못 말리는 동계 스포츠 사랑
메달이 전부가 아니야. 이기지 못하더라도 감동을 주는 게 스포츠야.” “정말 그럴까. 결국 메달을 따느냐 못 따느냐 하는 문제이지. 이기지 못해도 감동을 주는 건 분명하지. 하지만 그건 주목받는다는 걸 전제로 할 때야. 관심없어서 보지도 않는데 아무리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대도 일본인은 감동하지 않아. 애초에 어차피 모르는데 어쩌겠어.(69쪽)
육상경기도 시간을 다투지만 결국 운동회의 달리기 시합과 마찬가지야. 모두 출발선에서 달리기 시작해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이기지. 시간은 그다음이야. 그런데 동계 종목은 스키든 스케이트든 대부분 선수가 각자 달리고 그 시간을 비교해 우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이거든. 이게 분위기를 띄우는 것과 관계있다는 의견이 있어. 자 결전이다, 라는 긴박감이 없다는 거지.(중략) 확실히 인간 대 인간이라기보다, 적은 시계라는 느낌이지.(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