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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_주성철 편집장] 혼자를 기르는 법
주성철 2017-03-17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조리극 <더 랍스터>(2015)에서 가까운 미래의 사람들은 혼자를 기르며 살 수 없다. 어떻게든 완벽한 짝을 찾아야만 한다. 홀로 남겨진 이들은 커플 메이킹 호텔에 머무르며 ‘서로를 기르는 법’을 배우는 가운데, 유예기간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 영원히 숲속에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타인의 생명을 사냥해서 그 유예기간을 늘려야 한다. 호텔 사람들이 단체로 인간 사냥에 나설 때 극단적인 고속촬영과 함께 1920년대 그리스 노래인 <Apo Mesa Pethamenos>가 흘러나온다. 굳이 해석하자면 ‘내부로부터의 죽음’으로 “겉은 살아 있어도 속은 죽었다”고 노래한다. 남을 사냥하며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죽어버린 삶이다.

혼자 사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는 아파서 몸져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깻잎 먹을 때, 라는 어느 비혼 지인의 얘기에 모두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 적 있다. 그러고 보니 ‘혼밥’할 때 깻잎을 한장씩 벗겨먹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다. 물론 내 두손을 이용해 갈라도 되지만 누군가가 젓가락으로 깻잎의 몸통을 지그시 눌러주기만 해도 식사의 퀄리티는 달라진다. 누군가의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이 된다. <더 랍스터>에서도 인간 사냥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데이비드(콜린 파렐)가 혼자 등에 연고를 바르는 장면이었다. ‘사람은 왜 혼자 사는 게 힘들까’ 생각해보면, 내 몸인데도 내 손이 닿지 않는 부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깻잎을 혼자 벗겨 먹는 일만큼이나 내 등에 파스를 붙이는 것도 심히 힘든 일 아닌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인데 정작 나는 어렵다. <더 랍스터>에서 호텔 지배인은 “혼자보다 둘일 때 삶이 윤택하단 걸 느껴보세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뭐가 더 어떻게 윤택해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 장면을 통해서 짝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아, 저래서 혼자 사는 게 불편한 거구나.’

이번호 특집은 <씨네21>이 주목하는 대안의 만화 작가들이다. 세계 최대 만화 축제인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나쁜 친구>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한 앙꼬,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절망의 오피스레이디>라는 제목의 웹툰으로 그리면서 인기 작가가 된 킵고잉, <먼지아이> <나의 작은 인형상자>로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을 2년 연속 수상한 뒤 이제 세 번째 책 <연애놀이>를 내놓은 정유미, 서울에서 혼자 살아가는 20대 사회초년생 여성의 삶을 가감 없이 그려낸 <혼자를 기르는 법>으로 지난해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김정연 작가가 그 주인공들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가 ‘내 인생의 영화’로 “누구나 아는 시스템을 가장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영화”라며 역설적으로 서로를 기르는 법에 대해 얘기하는 <더 랍스터>를 꼽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덧붙여봤다.

이들 네 작가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에 기존의 화법이나 그림체와는 사뭇 다른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적어도 영화계와 겹쳐 보자면) 강박적인 ‘거대 서사’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스토리텔링 작업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숨통이 트이는 작품들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여러 창작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을 직접 만나고 온 우리 기자들에게도 그러했다.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 말하듯 ‘내가 나로 사는 방법’을 고민하는 독자 여러분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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