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청승이랄까, 요즘처럼 월세가 주름처럼 밀릴 때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주책맞게 찾아 읽는다. 뱃사람들에게 붙잡혀 농락당하는 알바트로스, 영락없이 예술가 처지와 닮아 있다. “방금까지 그리 아름답던 신세가, 어찌 그리 우습고 추레한가!” 제아무리 하늘을 고고하게 날아도, “땅 위의 야유 한가운데”로 끌려내려온 알바트로스는 그저 다리를 저는 우스꽝스러운 예술가 신세라는 것이다. 월세 밀린 무능력한 광대라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생활력 없는 예술가들이 조롱만 받고 사는 건 아니다. 가끔 동정도 받는다. 2011년 최고은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난한 예술가들을 동정하는 소리들이 세상에 넘쳐났다. 수많은 이들이 “남은 밥과 김치 좀 주오”라는 슬픈 유언을 연민했다. 그 덕에 소위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졌다. 예술 경력에 덧붙여, 얼마나 ‘가난’한지를 증명하면 남은 밥을 적선하는 온정의 손길. 그 몇 개월치 식량이 아쉬워 나 역시 신청서를 내려다 충분히 가난을 증명할 수가 없어 포기했다.
조롱을 하든 동정을 하든 ‘가난은 예술가들의 숙명’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그 인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가난이 창작의 원동력이라는 신화, 그리고 가난을 증명해야만 온정을 베푸는 또 다른 식민화는 교환가치로 쉽게 환산될 수 없는 예술 노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려는 자본주의의 무의식을 그렇게 낭만과 동정으로 은폐한다. 예술이라는 활동적 노동이 물신화된 자본주의 교환관계를 지속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며칠 전 인디뮤지션 이랑이 시상식에서 벌인 퍼포먼스를 두고 그렇게 뒷담화가 시끄러웠는지 모른다. 가난한 처지를 또박또박 발화하고 시상 트로피를 팔아치운 행위에 대해 불편하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예의를 지적하는 말들은 자가당착의 말풍선일 것이다. 본디 ‘상’이라는 게 스캔들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이랑의 퍼포먼스 덕분에 그간 밀려 있던 유명세를 얻었다.
이랑이 눈물로 가난을 전시하고 동정을 갈구했다면 사람들은 아마 불편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난입하듯 연출한 이랑의 퍼포먼스는 예술가가 왜 가난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도한 질문 그 자체였다. 가난은 예술가들의 숙명이라는 통념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순간이었다. 자못 그게 불편했을 거다, 그 인습의 통념이 부서지는 풍경이. 또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그랬다는 것도 그 불편함에 한몫 거들었을 테다.
그날, 이랑은 단순히 트로피를 판 게 아니다. 예술가들의 가난을 양산하는 왜곡된 문화산업 구조를 성토했다. 또 예술가들의 밥 한 그릇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삶의 권리라는 걸, 그 노동의 존엄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돈 안 되는 문화는 철거해야 된다는 이명박의 성과주의, 그리고 박근혜의 블랙리스트 농단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위에서 예술 노동의 존엄성을 외친 후배 딴따라, 나는 그래서 이랑이 참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