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은 내과 의사 승훈(조진웅)이 미제 연쇄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서울 인근 신도시에 기간제 월급 의사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스릴러영화지만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환자의 살인 고백을 듣고 범인을 예감한 승훈의 불안한 심리다. 그 불안의 정서가, 불길한 예감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을 때 영화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한다. “앞에서 문제를 내고 뒤에서 정답을 맞히는” 과정에서 이수연 감독은 빠진 퍼즐 조각 없이 정확히 정답을 맞춰준다. 용두사미로 끝나고 마는 보통의 스릴러영화들과 달리 <해빙>은 정답이 제시되는 과정에서 더 큰 재미를 안겨주는 영화다. 이수연 감독은 <라쇼몽>(1950)을 예로 들며 영화의 결말에 대해 의미 있는 설명을 들려주었지만 스포일러가 되고 말 그 이야기는 기사에 싣지 못했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은 잘 좀 피해서 써달라”는 당부를 여러 번 들어야만 했던 이수연 감독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4인용 식탁> 이후 14년 만에 두 번째 장편을 내놓았다. 그간 <E.D. 571>(2012), <래빗>(2008) 등 단편 작업들만 선보였는데, 어떻게 지냈나.
=시나리오 쓰고 투자 받으러 다니고 투자가 잘 안 되면 또 다른 것 쓰면서 지냈다. (웃음) 사실 7년 동안 매달린 작품이 있었는데 그 작품 때문에 공백이 이렇게 길어졌다. 내 이름으로 회사까지 차려서 노력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인어 이야기인데, 굉장히 야하고, 피비린내 나고, 유혈이 낭자한 이야기였다. 하드보일드한 잔혹동화 혹은 잔혹판타지물이랄까. 부산영상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서 최우수상도 받고, 한·일 합작이 필요한 작업이어서 영화진흥위원회 한·일 합작 비즈니스 캠프에도 참여해서 일본쪽 관계자들도 만나고 영화화 루트도 알아봤는데 결국 진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인어 이야기들이 나오더라.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도 있고, 주성치의 <미인어>도 있고. 내가 너무 앞서갔나 싶다. (웃음)
-<해빙>은 CJ문화재단의 스토리텔러 지원 사업인 프로젝트S 3기 작품이면서, 제작은 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로컬 프로덕션 대표인 최재원 대표가 맡았고, 투자·배급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담당했다.
=<해빙>의 트리트먼트가 세상에 처음 나온 건 2012년 4월이었다. 그 트리트먼트가 프로젝트S 3기 작품으로 선정되면서 지원을 받아 8개월의 시간을 들여 초고를 완성했다. 그걸 가지고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캐치에서 피칭을 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최재원 대표님이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는지 한번 만나보자 하셨다. 그렇게 위더스필름에서 <해빙>을 준비하게 됐다. 또 서울영상위원회가 마련한 창작 공간 디렉터스 존에 입주해 작업한 거라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이름들이 좀 많이 나오긴 한다. (웃음)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됐다.
-한강의 얼음이 본격적으로 녹는 4월에 한강 수난구조대가 가장 많은 시체를 건져낸다는 기사를 보고 이야기의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안다.
=첫 아이디어는 유튜브에서 본 ‘수면내시경을 하면 안 되는 이유’라는 동영상에서 얻었고, 수난구조대의 인터뷰 기사는 시나리오 마무리 단계에서 참고했다. 영화의 전체 구성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됐고 결국 거기서 <해빙>이라는 제목까지 나왔다. 애초 <해빙>의 제목은 ‘푸른 수염’이었다. 여러 명의 아내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와 그 비밀의 방문을 열게 된 아내의 이야기인 샤를 페로의 잔혹동화 <푸른 수염>에서 따온 제목이었고 지금도 영어 제목은 ‘Blue Beard’다. 어쨌든 수면마취 상태에서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서 누군가 정교한 살인 고백을 하게 된다면, 또 그걸 듣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이 영화의 직접적인 방아쇠가 됐다. 기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몰락하는 중산층에 관한 얘기들을 하고 싶었고,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되는 한 인간의 자기부정에 관한 이야기를 쓰게 됐다.
-전작의 주인공 역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괴로워하거나 기면증에 걸린 중산층이었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중산층 얘기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영화를 만들 때 늘 생각하는 게 동시대성이다. 이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고 봐도 재밌을지 그리고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는지 생각한다. 지금의 사회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이 결국 영화의 주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4인용 식탁>은 IMF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느낀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이었다. 우리 사회가 1970년대부터 30년간 쉼 없이 달려왔지만 결코 문제없이 달려온 게 아니었고, 30년간 덮어놨던 것들이 우리에게 덮쳤을 때 발생하는 이야기를 썼다. 반면 <해빙>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이야기다. 여기서 대별되는 건, 앞의 문제는 나에게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4인용 식탁>의 정원(박신양)이 마주하는 건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다. 반면 <해빙>의 승훈에겐 자신의 잘못이 존재한다. 그 차이는 크다. 한편으로 연쇄살인을 다룬 <살인의 추억>(2003)이나 <추격자>(2008)와 비교하면, 두 영화는 악은 악으로서 주어져 있고 다만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사회의 시스템을 비판한다.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거다. <해빙>의 경우 그러한 순연한 악에 대한 이야기를 바닥에 깔고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늘어나는 중산층 범죄였다. 중산층 범죄야말로 우리 사회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했다. 계층간 이동이 힘들고 두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전만큼 살지 못할까봐, 이전의 위치를 유지하지 못할까봐 그게 불안하고 두려워서 죄를 짓는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건 가치관의 전락이다. 경제적 계급이나 돈으로 환산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가치의 척도로 삼지 않으려는 윤리관의 전락이 가져온 문제들이 심각하다. <해빙>의 승훈에게 일견 동정이 가지만 그는 결코 눈처럼 하얀 사람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4인용 식탁>과 <해빙>을 만드는 동안 두번의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그 시기를 통과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되기보다 심화되는 상황을 목격했고, 그런 것들을 영화로 얘기하게 된 거다.
-<4인용 식탁>과 비교했을 때 <해빙>은 좀더 대중을 의식하고 만든 장르영화 같았다. 표현의 잔인함도 전작에 비해 덜하다.
=<해빙>과 마찬가지로 <4인용 식탁>도 15세 관람가 영화다. (웃음) <4인용 식탁>의 경우 훨씬 드라이한 시선으로 사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을 실어서 갈 수 있는 주인공이 없었다. 그런데 <해빙>에는 승훈이라는 마음을 실을 수 있는 주인공이 있다. 그 지점에서 관객이 느끼는 차이가 클 것이다. 또 <4인용 식탁>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건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직접적 폭력이 가감 없이 드러났기 때문일 거다. <해빙>에선 직접적인 표현들이 거의 없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미루어 짐작하는 과정에서 공포가 발생한다. 검은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지 않잖나. 봉투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보여줄 뿐이지. 또 전작의 경우 몇몇 충격적인 장면을 제외하곤 액티브한 장면이 부족했다. 반면 <해빙>에는 격투 신도 있고 남녀간의 체육활동(멜로 장면)도 있다. (웃음) 고저가 심한 이야기이고 시점의 변화도 있기 때문에 <해빙>이 더 다이내믹하게 느껴질 것이다.
-한편으론 이야기가 장르영화의 문법에 갇혀 있다는 인상도 들었다. 드라마로 풀었다면 주제가 더 잘 드러났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는데, <해빙>은 처음부터 심리 스릴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나.
=만약 드라마로 풀었다면 투자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즐거운 얘기는 아니니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어떻게 당의정을 씌워서 관객에게 제시하느냐의 문제인데, 그 과정에서 내러티브를 새롭게 구축하고 장르적 선택을 하게 된다. 이야기 자체의 힘을 믿는 편이다. 한 시대가 지나서 다시 꺼내 봐도 재밌는 이야기, 거기에 담긴 사회적 함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느 시대에 누가 봐도 공감 가는 재밌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이건 논설문이 아니고 신문의 사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달될 수 있는 형태를 가지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장르적 고려를 하게 된다. 장르적인 요소 자체가 무언가를 위한 도구는 아니지만 유쾌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정공법으로 이야기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일까 싶다. 어쨌든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꾼이지 논설문이나 사설을 쓰는 사람들은 아니니까.
-스릴을 증폭하는 긴장감 있는 촬영이 좋았다. 여성 촬영감독인 엄혜정 감독이 촬영을 맡았다.
=단편 <래빗>과 <E.D. 571>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함께한 작업이다. 엄혜정 촬영감독과 처음 만난 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였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상원에서 조교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엄혜정 촬영감독은 촬영전공 학생이었다. 조교와 학생의 관계로 얼굴만 아는 정도였다가 2007년쯤 다시 만나 단편 작업을 같이 했다. 그사이 엄혜정 촬영감독은 <핑거프린트>(2004)라는 단편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촬영상도 수상했고. 장편 데뷔가 늦어졌지만 촬영은 워낙 잘하는 분이다.
-캐스팅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
=시나리오 쓸 때 절대로 특정 배우를 생각하면서 쓰지 않는다. 꼭 누구여야 한다는 건 없다. 신구 선생님만 예외였다. (웃음) 정 노인의 경우 끝끝내 신구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고 실제로 캐스팅이 이루어져 꿈만 같았다. 대신 그런 기준은 있다. 절대로 피해야 할 캐스팅의 기준인데, 준비가 안 된 배우, 준비시켜도 안 되는 배우, 준비할 자세도 안 된 배우들과는 같이 작업할 수 없다. 당연히 <해빙>의 배우들은 제대로 준비할 자세가 되어 있는 분들이었다. 조진웅씨는 (체중조절을 통해) 몸까지 알아서 준비해올 정도였다. 캐스팅 과정에선 정말 많은 요소들이 고려된다. 그래서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캐스팅이 예술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게 어떤 카드가 주어지든지 앞서 얘기한 그 기준을 가지고 맨눈으로 배우들을 보려고 한다. 그 사람이 이전에 무슨 역할을 했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직접 만나서 맨눈으로 그 사람의 맨 얼굴을 보는 작업이 중요한 것 같다.
-오랜만의 장편 작업이었는데 영화를 마무리 지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첫 영화가 너무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그동안 쭉 시나리오도 쓰고 단편 작업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감흥은 없더라. 다만 달라진 환경은 체감했다. 당시만 해도 필름으로 찍었는데 이제는 디지털로 다 바뀌었고, 표준근로계약에 따라 업무 시간을 준수하면서 일하고, 제작보고회, 언론시사회, VIP시사회 등 마케팅 환경도 많이 변했더라. 아직까지 큰 감흥은 없는데 개봉하면 좀 달라지려나.
-<해빙> 이후의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나.
=집에 수도 없이 거절당한 시나리오들이 많이 있다. (웃음) <해빙>이 어떤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서 내 운신의 폭도 결정될 것 같다. 마음에 두고 있는 작품은 있다. 하나는 앞서 얘기한 인어 이야기고 다른 건 일종의 첩보물이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들이다. 첩보물의 경우 정권도 바뀌어야 가능할 것 같고. 하고 싶은 얘기는 여전히 많고 앞날은 알 수 없으니 늘 그랬듯 준비만 열심히 하고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