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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상실과 분노의 슈퍼히어로, 울버린의 마지막 싸움 <로건>
김현수 2017-03-08

<로건>은 휴 잭맨이 연기하는 마지막 울버린 영화다. 만화도 보지 않았고 연기가 뭔지도 잘 몰랐던 신인배우의 양손에 칼날 같은 발톱부터 끼우고 시작했던 <엑스맨> 시리즈는 울버린과 그를 연기한 배우 모두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휴 잭맨이 시리즈와 단독 주연작까지 모두 9편의 영화에 울버린으로 출연하면서 크게 기울어지거나 넘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온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째서 생애 가장 잔혹한 분노의 발톱을 휘둘러야 했을까. 비록 휴 잭맨의 울버린은 떠나지만 <로건>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늙고 병든 슈퍼히어로를 상상해보자.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시공간마저 자유롭게 오가는 그들이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최근의 많은 슈퍼히어로 소재 영화들의 기획 경향이 만화 속 비현실을 벗어나 현실 기반의 상상력과 개연성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되새겨보면 슈퍼히어로의 실버 라이프란 은근히 매력적인 소재다. 주로 전쟁과 테러를 모티브 삼아 만들어지던 히어로영화 속에서 진지하게 당대 정권의 노인 복지 정책 방향을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세상에서 슈퍼히어로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의 슈퍼히어로라는 희망이 영원히 멸망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상상 가능하다. 히어로의 비극적 엔딩이란 이미 코믹스 출판 시장에서는 책 판매가 저조할 때마다 궁여지책으로 쓰던 이야기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몰락한 히어로 앞에 등장한 소녀

<로건>은 바로 그런 슈퍼히어로, 정확히는 엑스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미래의 암울한 배경에서 시작한다. 때는 <엑스맨: 아포칼립스>(2016)로부터 40년 이상 지난 시점인 2029년의 근미래. 어째서인지 첫 장면부터 울버린(휴 잭맨)은 늙고 지쳐 있다. 그는 엑스 마크가 자랑스레 그려져 있는 코스튬이 아니라 허름한 정장 차림으로 리무진 기사 일을 하고 있다. 대단한 피로를 호소하듯 표정은 일그러져 있다. 로건은 역시 늙고 병들어 쓰러져가는 자비에 교수(패트릭 스튜어트)를 데리고 정부의 눈을 피해 멕시코 국경지대 인근에 숨어 산다. 왕년의 엑스맨 멤버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다. 세상은 몇몇 대기업의 횡포 속에서 점점 이상하게 망가져가고, 뮤턴트들은 국가안전국에서 대량살상무기로 분류되어 구금 대상으로 전락한다. 로건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보살피고 있는 자비에 교수는 치매 증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늘 아파하는 것처럼 자비에 교수 또한 자신이 저지른 어떤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듯한 모습이 암시된다. 그의 병은 그의 잘못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울버린은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시한부 선고 환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히어로는 모두 잊으라는 듯 보인다.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풍경과 그 위에 몰락한 어느 히어로의 몰골을 펼쳐놓은 뒤 영화가 다음으로 주목하는 건 미지의 존재인 소녀, 로라(다프네 킨)다. 누군가가 로건을 찾아와 자신의 옛 이름이었던 울버린을 외친다. 스스로를 간호사라 소개한 가브리엘라(엘리자베스 로드리게즈)는 딸인 로라를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부터 구해달라고 청한다. 그러고는 그녀가 꼭 가야 하는 곳이 있으니 안내해달라고도 말한다. 물론 우리의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슈퍼히어로 노릇은 진작에 은퇴한 듯한 몰골을 한 로건은 처음엔 그 말도 무시한다. 그러나 끈질기게 자신을 설득하려는 가브리엘라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마지못해 듣게 된 사연은 로건으로 하여금 다시 손등의 발톱과 울버린이라는 이름을 꺼내들게 만든다. 로건과 로라의 꽤 터프한 여행길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울버린 등장 영화의 인물 구도를 돌이켜보면 그에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울버린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간다는 것. 아무리 상처가 나도 자연 치유가 되는 ‘힐링팩터’의 소유자로서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기 때문에 내려진 형벌 같은 것. 지금 울버린은 매번 자기만 빼고 다 소멸하고 마는 경험을 하느라 심신이 너무나 지쳐버린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로라라는 존재는 과연 울버린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함일까. 아역배우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팬들이 거의 확신하고 있는, 로건의 딸 ‘X-23’과 로건 사이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이 전후 사정을 짚어보기 전에 잠시 울버린의 과거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울버린과 웨스턴의 성공적 만남

코믹스 작가 렌 웨인이 탄생시킨 캐릭터 울버린은 일종의 분노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그는 언제나 화가 나 있고 괴팍하며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본능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죽지 않는 존재로 태어나 수백년 동안 숨어 사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가족을, 또 누군가를 잃어야 했고 비밀 병기 프로젝트인 ‘웨폰-X’라는 실험을 통해 인위적으로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캐릭터의 기원부터 상실과 분노를 타고났던 것. 그러다보니 그를 거둬들였던 자비에 교수와 뮤턴트학교 내에서도 울버린은 사실상 리더지만 아웃사이더에 더 어울려 보였다. 울버린이란 캐릭터의 존재 깊숙이 자리잡은 이같은 특징은 시리즈 감독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도 큰 활력이 되어주었다. 그가 사랑하던 진 그레이(팜케 얀센)와의 갈등은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며 여러 캐릭터들의 구심점으로써 힘이 되어주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도 울버린의 이러한 점에 일찌감치 주목했다. <더 울버린>(2013) 역시 울버린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파헤치는 프랭크 밀러의 코믹스가 원작이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두편의 울버린 주연작의 목표를 “아이콘적인 슈퍼히어로를 애매모호하고 어둡게 그려내는 것”으로 세웠다. 처음부터 두편을 만들겠다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주목하는 울버린의 모습은 어둠이었다. 늙고 병들고 지쳐 있지만 마지막 분노의 감정만은 남은 짐승의 발톱 같은 울버린의 존재감은 당연히 그에게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또한 맨골드 감독은 죽음에 다가서는 울버린의 공포를 사무라이의 시각에서 풀어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스티브 매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서부극의 사연 많은 총잡이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늙고 지친 노인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발톱을 감추고 살아가는 남자에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대상이 생긴다면? 과연 그는 내일을 위해 무엇을 남겨두게 될까. 마찬가지로, 슈퍼히어로로서의 삶을 반추하면서 마지막 과업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는 일일 것이다. 사랑도 사람도 모두 잃고 재생되지 못하는 상처만 남겨놓은 울버린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충분한 동기가 되어주는 무언가는 바로, 로라의 미래다.

그런 의미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당대 서부극 장르의 틀을 깨고 인간과 폭력에 관해 되물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이다. 은퇴한 킬러가 현상금을 벌기 위해 잔인한 범죄자를 처단하겠다고 집을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로건>의 캐릭터 구도와 꽤 흡사하다. 아닌 게 아니라 휴 잭맨을 비롯해 많은 제작진이 울버린 캐릭터를 이번에는 서부극 장르 속 카우보이의 이미지에 대입해보자는 데 실제로 동의했다. 광활한 와이오밍의 산맥은 뉴멕시코 국경지대의 황량함으로 바뀌고 수십년 동안 만져보지 않아 장전조차 불안한 권총은 아다만티움 발톱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과거의 잘못을 홀로 짊어지기 위해 마지막 폭력을 행사하는 킬러의 선택은 로라를 위해 무언가를 남겨줘야 하는 로건의 심정과 닿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버전의 울버린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전작 <더 울버린>에서 원작의 장르성을 깨고 재창조하느라 길을 잃었던 전적을 마치 반성이라도 하듯, 뚜렷한 장르의 전형을 영화 전체의 방향으로 삼은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다. 흔히 슈퍼히어로라고 하면 어떤 액션의 형태는 상상할 수 있을지 몰라도 특정 영화의 장르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울버린과 웨스턴의 만남은 성공적이다.

가장 어둡고 가장 복잡한 슈퍼히어로

거기에 더해, 과거를 묻어둔 채 살아가던 남자의 처절하고 거친 마지막 싸움은 표현 수위상 무조건 19금이어야 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은 기획 초기 단계 때부터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강력하게 원했던 바다. <엑스맨> 시리즈 최초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로건>은 철저하게 어른을 위한 이야기로 기획됐다. 휴 잭맨은 이를 두고 “울버린은 코믹북 세계에서 가장 어둡고 가장 복잡한 캐릭터 중 하나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과 내가 걱정한 것은 오로지 안전벨트를 푸는 것뿐이었다”라고 말했다. 덕분에 관객은 역대 가장 많은 피에 젖은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발톱을 보게 될 것이다. 미래를 위한 울버린의 마지막 선택은 피의 전쟁이 될 것인가.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선택에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관객은 감동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은 액션의 표현 수위가 거칠어질수록 배가될 것이다. 울버린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관객은 울버린의 생애 가장 잔인한 분노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다. 세상을 위해 그가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무엇, <로건>에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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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이십세기폭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