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월17일, 해안가 작은 마을에서 총성이 울렸다.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두명이 죽었다. 시신을 발견한 마을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열명의 원로가 시신을 들것에 담아 군부대를 찾아갔다. 군인들은 흥분했다. 경찰가족 한명을 뺀 아홉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그리고 마을을 급습했다. 가옥 400여채가 화마에 휩싸였다. 1천여명의 주민을 운동장으로 몰아넣은 군인들은 아이들에게 빨갱이 가족을 골라내라고 지시한다. 여의치 않자, 마구잡이 학살이 시작됐다. 경찰 김병석은 증언했다. “군 지휘관들은 적을 죽여보지 못한 사병들의 경험을 위해 박격포 섬멸 대신 총살을 택했다.” 북촌리에서 443명이 숨졌다. 살아남은 남자가 없다시피 했다. 이듬해 전쟁이 터지고 3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1954년 1월, 주민들은 전쟁 때 죽은 마을 출신 장병의 추도식 자리에 모였다. 이때 누군가 “오늘은 우리 마을이 불타 사라졌던 날이기도 하니 그때 죽은 이들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하자, 아이고 아이고 눈물이 바다를 이뤘다. 경찰이 그 사실을 알았다. 이른바 ‘아이고 사건’으로 주민들은 모진 고초를 겪고,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나왔다. 이제 아무도 기억 속의 학살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북촌리의 고난은 1947년에 시작돼 1954년 가을에 끝난 제주 4·3학살의 한 정점이었다. 도민 30여만명 중 3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명령의 결과였다. 빨갱이의 기준도 없었다. 반세기가 흐른 뒤에야 정부는 사과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빨갱이 덧씌우기’가 멈춘 적이 있는가.
박근혜는 노골적이었다. “100% 국민대통합”을 외친 입으로, 최순실과 은밀히 만날 때는 빨갱이 적출을 주문했다. 탄핵 위기에 놓인 지금은, 복귀 시 복수의 뜻을 대놓고 밝힌다. 명령이라 여긴 걸까. 아스팔트 보수들은 연일 “군대여 일어나라.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 계엄령 선포하라. 촛불은 인민 태극기는 국민”을 외치고 있다. 달력을 보았는가. 올해는 4·3학살의 피바람이 70년을 맞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