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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로얄>, 그 폭력과 피와 결핍의 아수라
2002-04-06

너의 순정을 죽여주마 가차없이, 잔혹하게

2000년 일본 최고의 화제작 <배틀로얄>이 4월5일 무삭제로 개봉한다. 폭력성 논쟁을 낳으며 빅히트를 기록한 이 영화는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지만 일본영화 수입제한규정 때문에 한동안 국내 관객과 만나기 어려웠다. 산세바스찬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개봉요건을 갖춰 곧 극장에 걸리는 <배틀로얄>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야쿠자영화의 대부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망해본다. <씨네21> 통신원 사토 유가 직접 진행한 감독인터뷰까지 <배틀로얄>에 대한 모든 것을 모았다. 편집자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오는 총격전을 본 적 있는가?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울려퍼지는 학살극을 상상해보았는가? 지난해 봄 화창하게 개인 어느 날, “좋아하는 애 있니?”라고 묻던 친구가 눈앞에서 목이 잘려 쓰러져도 반항할 수 없었던, 겁먹은 소년의 창백한 눈동자를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가? <배틀로얄>은 숨이 멎을 듯 격렬하게 전개되는 폭력장면과 상실의 아픔이 배어나는 시적 이미지로 이뤄진 ‘레퀴엠의 영화’이다. ‘죽음’은 <배틀로얄>의 시작이자 끝이다. 죽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간 소년, 소녀조차 영원히 쫓겨다니는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기타노 다케시)은 말한다. “인생은 게임이다. 다들 열심히 싸워서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거다.” <배틀로얄>은 오직 살아남은 자만 가치있는 어른이 되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정치 스캔들로 오히려 폭발적 흥행

2000년 일본에서 이 영화는 자국에서만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히트작이지만 흥행 이전에 정치권을 들쑤신 스캔들이었다. 영화를 미리 본 일부 국회의원들은 청소년에게 이런 폭력적인 영화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성토하기 시작했다. 한 국회의원은 청소년 입장가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묘사를 보고 강력히 제한하자는 법률개정안을 내놓았고, <배틀로얄> 상영을 금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폭력묘사에 관대한 입장을 보였던 일본에서 정치권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엔 당시 사회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 고베에선 15살 소년이 초등학생을 납치해 머리를 잘라 학교 정문 앞에 놓아둔 사건이 있었고, 17살 소년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죽인 일도 발생했다.

청소년 강력범죄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중학생들이 오직 한명만 남을 때까지 같은 반 친구를 죽인다는 설정은 등골이 서늘해질 만하다. 한마디로 무서운 10대들에게 겁이 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권이 보인 특별한 관심은 <배틀로얄>의 상업적 성공에 대단한 도움이 됐다. <타임 아시아>에서 일본 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정치적 논란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흥행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정치인들에 대한 항거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배틀로얄>은 만화로도 만들어진 다카미 고순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가까운 미래의 일본, 실업률 15%, 실업자 1천만명, 등교거부학생 80만명 등 사회는 불안하고 학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신세기 교육개혁법’이라는 명분을 갖고 탄생한 ‘배틀 로얄’(Battle Royale)은 전국의 중학교 가운데 1개반을 무작위로 선택해 고립된 섬에 데려다놓고 1명만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법률이다. 중학교 3학년 학생 42명이 간택되고 살인게임이 시작된다.

얼핏 누가 살아남는가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단순한 액션영화 같지만,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1930년 태어나 종전되던 1945년에 영화 속 인물들처럼 15살 소년이던 노감독 후카사쿠 긴지가 원작소설에 관심을 보인 것은 조금 다른 이유이다. <타임 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15살 때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공장은 매일 폭격을 당했고 나는 또래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치워야했다. 그걸 한군데 모아서 태우는 것이었다. 거기서 전쟁과 죽음의 의미를 배웠다. 그런 뒤 갑자기 일본이 전쟁에서 졌다. 어른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후카사쿠는 원작소설에서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전쟁’과 ‘죽음’을 본 것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배틀로얄>은 영화 전체가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영영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이뤄져 있다. 정수리에 칼과 도끼가 꽂히고, 입에 수류탄을 문 채 터져 날아가고, 낫에 목이 잘리고, 온몸에 총알이 박히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는, 그 모든 잔인한 장면에 드리운 그림자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내몰린 자들을 향한 연민이다. 그 애틋한 감정은 <갓 앤 몬스터>에서 등장하는 감독 제임스 웨일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웨일은 평생 1차대전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적군과 아군 중간 지점에서 철조망에 찢겨죽은 연인이 썩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던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에게 전쟁의 상처를 이식했다. 괴물의 이마에 선명히 드러나는 꿰맨 흔적은 철조망에 찢어진 것처럼 흉하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진정 ‘친구’를 갈망했지만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시스템 - 15살의 순정의 추억을 난도질하는 괴물

<배틀로얄>에서 진정한 괴물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존경쟁으로 몰아넣는 시스템이다. 한명만 남을 때까지 친구를 죽인다는 설정이 단지 철모르는 10대들한테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라는 건 영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죽음이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데서 드러난다. 어느 날 학교에 돌아온 아들은 “슈야, 힘내라”라는 한마디 유언을 남겨놓고 목을 매단 아버지를 발견한다. 아버지가 겪은 절망과 무력감이 ‘배틀 로얄’에 선발된 아들에게 유전된다. 두번째 등장하는 죽음은 ‘배틀 로얄’에 반대한 담임선생님이다. 피눈물이 흘러 채 눈을 감지 못한 선생님의 시체가 학생들 앞에 등장하면, 살인게임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죽느냐 아니면 죽이느냐’밖에 없다. 친구를 믿었던 소녀는 배신당하고, 현실도피를 꿈꾸던 소녀들은 서로를 의심하다 공멸하며, 혁명을 꿈꾸던 친구들에겐 날아오는 총탄에 대적할 무기가 없다. 그렇다고 죽이는 쪽에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연하게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르던 소녀는 너무 일찍 세상의 더러움을 알았기에 언제나 외톨이였다. “강해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던 그녀는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난 그저 빼앗는 쪽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살인게임을 지휘하는 선생님 역시 시스템의 희생자이다. 지난날 학생들에게 수모를 당했던 그는 ‘배틀 로얄’의 의미를 한마디로 단정한다. “이 나라는 이제 끝장이야.”

후카사쿠는 스크린에 피 칠갑을 하는 이 영화를 “우화 혹은 동화”라고 말한다. “전쟁의 견고한 이미지를 전달하되 그 방식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방식이 아니라 동화처럼 풀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독이 말한 ‘동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솝우화나 그림동화 같은 종류는 아니다. 미소년, 미소녀로 이뤄진 학생들의 면면에다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짧은 교복치마까지, <배틀로얄>은 순정만화 혹은 저패니메이션의 필체와 감수성을 따른다. ‘배틀 로얄’이 그들을 죽음의 경주로 밀어넣는데도 아이들은 삼각관계에 휩싸이거나 짝사랑에 몸달아한다. “니 앞에서 영원히 달릴 거야”라고 말한 소녀와 “그럼 난 니 뒷모습만 볼게”라고 답한 소년은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기 직전 만난다. 마지막 숨을 내쉬며 소녀는 소망을 빈다. “주여, 한마디만 더 할게요.”

묘하게도, 낯이 뜨거울 만큼 유치한 이런 대목들이 <배틀로얄>의 차디 찬 폭력묘사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짝사랑하던 소년이 다치자 붕대를 감아주며 소녀의 가슴은 벅차오른다. 소년을 간호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는 말한다. “난 너에 대해 다 알아. 이 의미를 알겠어?” 소녀는 다음 순간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그녀가 남긴 한마디만이 소년의 머릿속에 맴돈다. “이 의미를 알겠어?”

전쟁이, 살인게임이, 생존경쟁이 정말 몸서리쳐지는 순간은 그들의 풋풋하고 설익은 사랑과 우정, 바로 순정만화의 세계가 무너지는 때이다. 후카사쿠는 15살 아이들에게 순정의 추억을 빼앗아가는 것이야말로 시스템이 저지르는 가장 잔인한 범죄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서구 평자들이 이 영화를 무인도에서 권력투쟁을 벌이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이나 서바이벌 게임을 다룬 영화 <러닝맨> <롤러볼> 등에 비견하면서 놓치고 있는 대목도 이런 부분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지극히 감상적인 어떤 측면을 <배틀로얄>은 주저없이 품에 안는다.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후카사쿠가 연출하려다 포기하는 바람에 연출까지 맡게 된 영화 <그 남자 흉포하다>로 데뷔한 기타노 다케시는 <배틀로얄>에서 살인게임을 지휘하는 선생님 기타노로 나온다. 기타노의 존재는 아이들이 꿈꾸는 순정만화적 세계와 대척점을 이룬다. 학생은 선생님을 무시하고, 딸은 아버지를 멸시한다. 더이상 10대들과 대화할 수 없게 된 기타노는 복수를 감행한다. 반항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망설임 없이 칼을 던지고 리모컨 단추를 눌러 목을 터트린다. 아무 표정없이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기타노의 이미지는 <소나티네>나 <하나비>에서 봤던 대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타노의 복수는, 그러나 자해에 가깝다. 오래 전 비오는 날 강가에서 소녀는 기타노의 진심과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 “처음 수업에 들어가면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돼. 시간이 지나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고 사랑스러워져.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말하자면 기타노는 <프랑켄슈타인>에서 더이상 친구도, 가족도, 대화할 상대도 없어 좌절한 괴물이다. 이마에 꿰맨 흔적이 뚜렷한 흉한 몰골이 아니라 단지 얼굴 근육을 실룩거릴 뿐인 무표정한 중년 사내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기타노에 대한 동정심을 자아낸다.

<배틀로얄>에서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 10대들을 향한 안타까운 시선은 기타노처럼 망가진 어른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전쟁을 경험한 기성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간 단절을 경험했던 후카사쿠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세대간 소통부재의 현실에서 ‘친구’와 ‘가족’을 목말라하는 괴물을 본다. 3년 전 ‘배틀 로얄’의 생존자였던 소년이 다시 전장에 뛰어들어 그 의미를 깨닫고 싶어했던, 사랑하던 소녀의 미소가 뜻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어른도 아이도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꿈에서나마 보고 싶어한다.

일본에서 2000년 12월 개봉했던 <배틀로얄>은 이듬해 4월, 8분이 추가된 ‘특별판’으로 재개봉됐다. 국내 개봉되는 영화는 이 특별판으로, 덧붙여진 8분은 몽환적으로 처리된 레퀴엠이다. 원래 엔딩은 감독이 10대들에게 들려주는 당부였다. 죽은 친구의 칼을 품고, 세상이 그들을 이방인으로 몰아세워도 두손을 꼭 잡고 “뛰자!”. 특별판은 이 엔딩 다음에 3개의 레퀴엠을 붙여놓았다. 아마 후카사쿠는 영화의 엔딩에서 등장인물들의 소망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위하던 순간을 붙잡아두며 기타노의 진심이 깃든 염려로 고별사를 쓴다.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자막으로 다시 한번, “이제 어른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남동철 namdong@hani.co.kr▶ <배틀로얄>, 그 폭력과 피와 결핍의 아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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