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처럼 전시를 보러 갔다. 마침 살이 에일 듯 극강 한파가 기승을 부린 날이라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었지만 흔치 않은 건축 전시라 흥미가 동해 온몸을 칭칭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엄밀히 말하면 건축 전시가 아니라 ‘건축가의 삶展’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는 르코르뷔지에의 전시였는데, 들어가자마자 그의 장례식부터 보여줬던 전시 구성은 꽤 신선했다. 그가 자신의 장례식에 쓰일 음악을 생전에 선곡해놓았다는 음악이 전시관 곳곳에서 흘러나왔는데 척박한 내 클래식 상식 중에도 가장 애정하는 곡이 끼어 있어 반가웠다.
사실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아파트를 처음 ‘발명’했다는 정도만 사전에 알고 갔는데 현대건축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인생 대부분 공격만 당하다가 말년이 되어서야 겨우 얻어낸 훈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건축가보다는 화가가 되고 싶었고 당대 최고의 화가 피카소에게 콤플렉스를 느낀 자였다. 모든 예술가들이 모인다는 파리에 젊은 나이에 와서 그는 실패를 거듭했고 고민 끝에 이름을 바꿨다. 르코르뷔지에는 그의 실명이 아니었다. 예술을 하기엔 이름이 지나치게 평범했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새로 만들었다. 일종의 마케팅이었던 셈이다. 늘 동그란 안경을 쓰고 중절모와 나비넥타이를 맸다. 자신을 아이콘화시킨 것이다. 전략은 주효했다. 그는 기회를 얻어냈다.
문득 그가 과거의 사람이 아닌, 현재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예술한다는 작자가 작품에 대해 고민하진 못할망정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에 잔머리나 굴린다고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를 공격해댔던 평범한 자들과 뭐가 다르겠나. 그렇게 얻어낸 기회마다 기존 문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고깝게 봤을 것이다. 명예욕에 눈이 멀어 건축을 훼손한다는 공격은 지금도 예술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개다. 하지만 그 논란은 100년 후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그가 개발한 필로티 구조로 건물이 지어지는 걸로 끝났다.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그가 프로젝트마다 그전에 했던 작업물보다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 지점이었다. 그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엄청난 의심과 검증을 자기 안에서 반복했을 것이다. 그 치열한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느라 주변에서 하는 말들은 파리가 왱왱거리는 정도였을지도.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괴로웠을 것이다.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오해받을 때의 스트레스를 그 역시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던 거겠지.
유럽 각지를 돌며 중요한 건물들을 남겨놓은 위대한 건축가였지만 그가 말년에 머문 곳은 지중해의 4평짜리 작은 통나무집이었다. 단순함은 본질이고 겸손은 낮춤이 아니라 존중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가 천재형이었는가 하면,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리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어쨌든 그의 고민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부분이라는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그는 집 앞 지중해에서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죽었다. 선물과도 같은 아름다운 죽음은 그의 삶에 대한 절대자의 리스펙트였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