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계 명망가인 구겐하임 가문의 특이한 상속녀 페기는 사치스런 백만장자의 버릇없는 딸과는 달랐다. 외로웠고 기이했던 페기는 자신을 매료하는 것들에 인생을 기꺼이 던졌고, 어딘가 일그러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예술을 택했다.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는 20세기를 앞서간 여성이자 탁월한 아트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의 예술과 욕망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뉴욕, 파리, 런던, 베네치아를 편력하며 살아온 코스모폴리탄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다룬다. 그런 만큼 1920년대부터 전후 현대미술의 방대한 카탈로그가 작품 내내 화려하게 펼쳐진다. 페기는 공허를 메우듯 예술에 탐닉했고 섹스에 골몰했다. 두번의 결혼 후 끊임없이 남자들을 갈아치웠고 이에 대한 은밀한 사생활의 기록을 책으로 남기는 당돌한 모험도 감행했다. 삶의 후반기에는 베네치아에 수십년 머물면서, 거주지인 페기 구겐하임 팔라초에 현대미술의 인상적인 컬렉션을 마련했다. 패션계에서 활동해왔던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 감독은 <패션 여제: 다이애나 브릴랜드>(2010)에 이어 패션과 예술계를 편력한 걸출한 여성의 다큐멘터리를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작품 전개의 상당 부분은 전기작가 재클린 웰드가 페기와 직접 나눈 인터뷰 녹취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페기의 육성을 통해 당시 그녀가 교류했던 예술 현장, 예술가들의 관계가 생생하게 증언된다. 감독은 페기의 예술사적 업적 못지않게 인간적인 측면과 약점까지도 파고들어가며 예술가 다큐가 빠지기 쉬운 찬미와 장엄의 뉘앙스를 벗겨냈다. 페기가 자신의 삶에 대해 그러했듯이, 시크하고 유머러스하며 거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