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스카상 수상자는…”(and the Oscar goes to…)이란 프롤로그에 쉼표가 따라붙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후보들의 희비는 엇갈린다. 상을 받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누구나 얘기하지만, 후보에 올랐는데 상을 마다할 후보가 또 있을까.여기 유력한 후보였지만 아쉽게도 아카데미와 연이 닿지 않은 이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또 뺐기다니...
리들리 스콧과 피터 잭슨
< 리들리 스콧은 올해도 웃지 못했다. 1992년의 <델마와 루이스>, 지난해의 <글래디에이터>에 이어 3번째 감독상 후보 지명. <글래디에이터>가 5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동안 수상자들의 경의어린 소감에 거듭 거명됐지만, 정작 감독상에 호명되지 못했던 지난해의 악몽을 과연 떨칠 수 있을까. 지난해 오스카에서 스티븐 소더버그에게 감독상을 빼앗긴 뒤 작품상을 받고도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던 스콧은, 올해 시상식 카메라에도 몇 차례 건조한 표정으로 담겼다. 기대도 실망도 않겠다는 듯,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를 굳게 다문 채로. <블랙 호크 다운>이 감독협회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상식이나 언론매체들의 예측에서 감독상에 거론되지 않았던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스콧은 2년 연속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는 작은 명예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아쉽기로 말하자면 피터 잭슨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다. 네티즌을 비롯한 관객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등에서 가장 유력한 감독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각색상, 작품상까지 3개 부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으나, 무관으로 남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니 최다 후보 지명을 받고도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모두 놓친 잭슨은, 스콧보다 더 속이 쓰릴지도. 혹은 벌써부터, 다가올 <반지의 제왕> 2부작과 함께 ‘왕의 귀환’을 벼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꼭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러셀 크로
“꼭 필요한 건 아니다”(Not Necessary). 레드 카펫을 밟으며 코닥시어터로 들어서는 러셀 크로에게 한 리포터가 수상에 대해 물었을 때, 크로는 쿨하게 답했다. “내가 후보에 오른 건 덤일 뿐.” 영화 자체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이미 골든글로브와 배우협회, 영국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고, 평론가 로저 에버트를 비롯한 다수 언론의 예상에서도 “러셀 크로”라 입을 모아왔으니,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크로가 스펜서 트레이시, 톰 행크스에 이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2년 연속 수상하는 명예의 전당에 오를지는 시상식 전부터 화제를 모아온 터. 결국 덴젤 워싱턴이 시상대에 오르자 크로는 다른 패자들에게서 보듯 점잖은 미소를 띠우지도, 아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무뚝뚝하게 거의 미동도 없던 얼굴은, <뷰티풀 마인드>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차지한 뒤에야 슬그머니 미소로 풀어졌다. 감독 론 하워드를 비롯해 프로듀서 브라이언 그레이저, 작가 아키바 골즈먼 등 <뷰티풀 마인드>의 수상자들이 모두 앞다퉈 그의 공을 치사했지만, <인사이더>에 이어 이번 수상의 불발도 섭섭한 기억으로 남을 듯. 트레이시나 행크스처럼 미국의 대표적인 얼굴들과 나란히 오스카 2연패의 기록을 공유하기엔, 호주 출신의 이방인이란 것도, 할리우드에서 ‘배드 보이’의 악명을 높인 그의 오만불손함도 감점요인이었으리라는 후문이다.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안 매켈런
“짐 브로드벤트의 수상이야말로 사실상 시상식의 첫 이변이었다”는 로저 에버트의 말은 좀 과장이라 하더라도, 이안 매켈런의 남우조연상 탈락에 의외란 반응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영국의 영화잡지 <엠파이어>의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브로드벤트는 또 다른 장벽을 무너뜨렸다”며,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수상을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더구나 <반지의 제왕>의 성공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한 또 한명의 영국 배우 매켈런을 제치고라니 말이다. <버라이어티>의 오스카 특별부록에서 광고일망정 표지를 차지한 매켈런은 현지매체들의 예보와 관객 조사에서 단연 수위를 달린 후보. 배우협회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승기를 굳히는 듯했으나, 골든글로브가 브로드벤트를 택하면서 마지막까지 팽팽한 승부를 벌였다.호러영화의 거장 제임스 웨일의 말년을 살려낸 <갓 앤 몬스터>로 99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가 로베르토 베니니에게 밀렸던 전적에 이어, 이번에도 상복은 없었지만. 오스카 원정에 나선 <반지의 제왕>의 다른 동료들 대부분이 그랬듯 말이다. 그나마 영국 동료에게 트로피를 넘긴 것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반지원정대의 여정을 이끈 현숙한 마법사 간달프에게는, 천길 낭떠러지 아래서 부활할 속편의 기회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노! <노 맨스 랜드>!
<아멜리에>
적어도 하나의 트로피는 안고 돌아가리라는 <아멜리에> 제작진의 희망은, 예상치 못한 다크호스 <노 맨스 랜드>에 밀려 무너졌다. 각본, 촬영, 음향, 미술, 외국어영화상까지 5개 부문 후보 지명. 미국에서 개봉한 프랑스영화 중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비평에서도 환대를 받은 <아멜리에>의 오스카상 수상을 의심하는 매체는 거의 없었다. 외국영화보다 자국영화를 선호하는 오스카의 성향을 감안해 다른 트로피를 잃는다 해도, 외국어영화상만큼은 적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미국 내 배급사가 오스카를 겨냥한 적극적인 홍보전으로 이름난 미라맥스였으니, <아멜리에>의 마케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전쟁 중에 서로 적인 두 병사가 고립되면서 겪는 갈등을 다룬 <노 맨스 랜드>는, 지난해 칸에서 각본상을 받으며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영화. 미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쟁에 대한 예리한 풍자로 호평받으면서 입소문이 잘 퍼졌는지 골든글로브에서 <아멜리에>를 제치고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여세를 몰아 오스카의 외국어영화상까지 차지하면서 <할리우드 리포터> 등 다수 미국 언론들로부터 “전복적인” 이변으로 꼽혔지만, 수상 자체에 대한 논란은 아니었다. 마지막 보루마저 잃은 <아멜리에>는 5개 부문 후보에만 그쳤고, 외국영화 못지않게 수상권에서 소외된 미국 인디영화 <인 더 베드룸>과 불운한 타이 기록을 공유했다.
왕국의 자존심에 금가다
<몬스터 주식회사>, 디즈니와 픽사
하필이면 74년 만에 창설된 장편애니메이션 부문의 첫 트로피를 드림웍스에 넘기다니, 애니메이션 왕국 디즈니로서는 자존심에 금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932년부터 단편애니메이션 부문을 거의 독식하면서 각종 공로상을 포함한 32번의 수상으로 최다 기록을 보유한 월트 디즈니가 살아 있었다면 울화통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거슬러올라가지 않더라도, <인어공주>부터 <라이온 킹>까지 승승장구한 경력이 아까울 법도 하다. 하지만 <슈렉>이 호명되니, 미리 녹화된 화면상에서 <몬스터 주식회사>의 제작진 틈에 앉아 있던 설리와 외눈박이 마이크는 눈꼬리와 어깨를 늘어뜨리며 힘없이 박수를 보낼 수 밖에. 드림웍스와 PDI 제작진의 환호와 함께 슈렉과 귀를 쫑긋 세우며 그에게 볼키스를 퍼붓는 동키의 신이 난 모습과는 대조적이었지만, 이들 캐릭터들은 실망하는 폼마저 깜찍해 좌중에 웃음을 선사했다.평단의 호감을 사고 지난해 최고 흥행작 대열에 오른 <슈렉>의 수상은 예견된 것이었으나,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오프닝을 기록하며 선전한 디즈니와 픽사의 <몬스터 주식회사>가 역전을 노린 것도 사실. 디즈니의 파트너인 픽사는 이미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벅’스 라이프> 등으로 오스카의 주목을 받아온 터였다. 음악과 주제가, 음향편집까지 4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몬스터 주식회사>는 주제가상에서 랜디 뉴먼이 한풀이를 하는데 그쳤다. 그나마 <포 더 버즈>로 올해 단편애니메이션상을 차지한 것을 위안삼을 수밖에. 아마도 설리와 마이크는 돌아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장편애니메이션 부문) 진작 좀 만들지….”
황혜림 blaue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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