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는 것이 단순히 돈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개인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두꺼운 코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운좋게도 고도성장기에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현재 가난은 계층이동 불가능성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추락은 가능하되 상승은 불가능한 종류의 이동 불가능함이라, 자수성가도 과거의 푸른 꿈으로 끝났다.
돈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상적인 선택지가 머릿속에서 사라진다는 뜻이다. 자주 이사해야 한다는 뜻이며, 인간관계 역시 수시로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최현숙이 가난한 70대 남자 노인 둘을 인터뷰한 <할배의 탄생>을 보면 인터뷰이 중 한 사람인 김용술씨는 양복점 테일러, 섹스 비디오방 주인, 채소 장사 등 일자리를 따라 전국을 떠돌며 여자들과 잠깐씩의 관계를 맺었고, 지금도 그렇게 지낸다.
린다 티라도의 는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다. 빈곤이 삶의 모든 면모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우리의 노동윤리(또는 노동윤리의 부재), 우리의 스트레스 해소법(난잡한 빈자들이여), 우리의 건강관리 행태(안다, 내가 흡연자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경험한 이 모든 것은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의 경우라고. 그녀는 백인으로 인식되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 외향적인 성격을 타고나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니까.
일간지 경제면에서는 가난이라는 게 7억원짜리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 임대업을 해보려고 5억원짜리 집을 대출로 샀다가 겪는 어려움 정도로 말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시간당 6470원을 받고 일하고, 수당이 없는 초과근무를 하고, 병가나 4대보험은 기대할 수 없으며, 급여로 생활비를 내고 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여가가 뽑기방에서 뽑기를 하고 TV 앞에 앉아서 가성비 좋은 편의점 도시락을 매일 종류를 바꿔가며 먹는 것 정도인 사람이 처한 어려움은 쓰지 않는다. 매체 종사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산층의 관심사, 그들의 관점이 빈민의 삶을 개선하지는 않으면서 왜곡하기만 한다. 그래서 티라도는 직접 자기 계층의 이야기를 썼다. “죽도록 일하고 노동시간을 늘려달라 애걸하고 동전 한푼도 헛되게 쓰지 않는데도 정기적으로 전기세를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영혼이 죽는 경험이다.” 1년 동안 한주도 빠지지 않고 맞벌이한 부부는 2만5천달러 정도를 벌었다. 그것은 미국 저소득층에 속하는 전체 인구 3분의 1 중에서 제일 위에 해당하는 연소득이었다.
교육을 통해 더 나은 기회에 도전할 수 없을까? 교육을 선택하려면 “현금을 내야 하고, 일터에서는 노동시간을 많이 받을 수 없게 되며, 스케줄이 경직되어 일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어”진다. 티라도는 공부를 좋아했지만 대학 교육의 결과 빚만 졌다. 티라도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기 전, 정치 조직 운동을 하며 더 보람차고 덜 고된 방법으로 생계를 이으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있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특권을 제공받는 대가로 처음엔 아주 적은 보수에 수긍해야 한다. “엄마와 아빠가 당신을 도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쪽 분야로 갈 수 없다.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하층계급 출신인 경우는 많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일은 무급 인턴이다. 돈이 없으면 먼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를 할 수 없다. 언제나 ‘눈앞에 주어진 것을 택해야’ 한다.
“결국에는 무언가 나쁜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블리주’는 해야 하면서도 ‘노블레스’ 취급은 받지 못한다. 생존의 요구에 시달리느라 자신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라져버리고 말아, 누굴 만나 이야기할 화제라는 게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현실 세계라면,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는 최근 해고당하고 택시를 몰게 된 운전사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서야만 보이는 것들을, 티라도는 끝내주게 잘 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