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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인터뷰

<Z>

지난해 12월 중순, <Z>(1969)와 <의문의 실종>(1982)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거장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대표작들이 복원되어 프랑스 전역 상영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갖는 특별전이 열렸다.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무려 12시간에 걸쳐 열린 이 특별전을 앞두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프랑스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 컬처>에 출연했다. 3시간짜리 특별 인터뷰가 추가되어, 9개의 영화가 먼저 DVD 세트 1차로 선보였다. ‘모든 영화는 사실 정치적’이라는 롤랑 바르트에 동의한다는 그가 자신의 영화 인생과 이 예술 장르에 대한 진솔한 속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현재 사실상 중도우파와 극우파의 대선 대결을 앞두고 있는 프랑스에서 그가 오랜 정치영화의 거장으로서 겪어온 경험과 태도, 그리고 시네마테크에 대한 생각들까지 지금의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한다.

<고백>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로 파리에 온, 그리스 출신 20대 청년이었던 당신은 1년이 조금 더 지나 영화학교 이덱(IDHEC,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페미스의 전신)의 학생이 되었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인이기도 하다. 어떻게 프랑스에 오게 되었나.

=1955년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 리옹역에 기차로 도착했을 때가 새벽이었는데 안개가 어스름하게 내린 역 부근의 풍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가 그리스 왕당파에 반대하는 국가자유전선 레지스탕스였는데 그 대가가 비쌌다. 1945년 국민투표 이후 왕당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고 그 결과로 그리스 중산층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아버지가 레지스탕스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어느 대학에도 갈 자격이 되지 않았다. 해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가족들이 미국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으나 미국에서는 아버지를 완벽한 공산주의자로 취급했다. 미국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할 수도, 그렇다고 부모님이 나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수년간 열심히 잡일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프랑스어는 한마디도 못했는데 그래도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문법 기초 등은 갖추고 있었다. 번역되어 소개된 프랑스 문학을 감명 깊게 읽었고,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 프랑스에 와서 소르본대학에 들어가 문학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쉽게 말해 친구들을 여럿 초대한 저녁식사를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테이블에 여럿이 둘러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면 모두 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집중한다. 이야기만으로도 사람들은 웃고,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질 수도 있다. 영화감독(realisateur)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저 이야기꾼(raconteur)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꿈을 갖고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곧 영화라는 매체로 마음을 바꿨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면서 이 새로운 장르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나도 이렇게 이미지와 소리를 사용해 내 이야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덱에서는 ‘우리 학교에 그리스 출신은 흔치 않지!’라면서 나를 뽑아줬다. 영화의 기술과 역사와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집중, 종종 숨죽이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다가 영화가 끝나면 박수를 치는 것… 그 모든 게 나를 매료시켰다.

-당신이 말한 ‘이야기꾼’이라는 컨셉은 발터 베냐민의 ‘이야기꾼’(스토리텔러) 컨셉과 맞닿아 있다.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감정을 전달하고 자신의 경험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가. 발터 베냐민에 대한 오마주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자주 소설을 원작으로 해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고, 여기에 이미지와 음악을 더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들면, 그 이야기는 곧 영화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덱을 졸업하면서 나는 <L’Ambitieuse>(1959)를 찍고 있는 이브 알레그레의 현장에서 15일의 인턴십을 바로 하게 되었다. 거기서 클로드 피노토를 만났고, 인턴십이 끝나자 그가 다른 영화의 연출부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때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리고 르네 클레르, 르네 클레망, 자크 드미, 앙리 베르뇌유, 마르셀 오퓔스 등의 조연출을 경험했다. 정말로 나는 운이 좋았다. 그 옛날의 거장들을 가까이 보면서 어떻게 그들이 일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배우들과는 어떻게 일하고, 현장을 어떻게 이끌고….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인가 르네 클레망이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몇주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우연히 살인자를 다룬 스릴러 소설을 한권 접하게 되었다. 소설을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제작사에 가져다줬더니 시나리오가 좋다면서 바로 ‘우리 이거 영화하자’라고 하더라. 판권을 해결하고 제작사에서 나에게 어떤 배우들이랑 함께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인턴십을 하면서 이미 만난 자크 페랑이랑 카트린 알레그레를 생각했다. 그 사이에 시몬 시뇨레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시골집에 나를 초대했고, 그리스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리스의 내전과 정치 상황, 그리고 감옥에 가 있던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말고 싶어 했다. 그리스 이야기를 다 하고, 곧 찍게 될 첫 영화에 대해 말했는데 그녀가 나에게 답했다. “카트린은 바칼로레아(프랑스 수능)를 준비해야 해, 그렇지만 나는 그 배역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단, 네가 원한다면 말야.” 곧 이브 몽탕이 찾아왔다. “요즘 듣자하니 네가 좋은 시나리오로 영화를 한다는데, 내가 할 만한 역할은 없을까?”라면서 말이다. 빠른 속도로 내 영화는 ‘친구들끼리’ 하는 영화가 되었고 사실 나는 당시에 좀 겁을 먹었다. 영화가 잘 안 되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 게다가 그들이 다 친구인데 모두에게 재앙이 될 테니까. 다행히 영화는 성공적이었고 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비평적으로도 좋은 평을 받았다. 이렇게 첫 영화를 시작했고 한번도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다.

-이 첫 번째 영화 <잠자는 살인자들>(Compartiment tueurs, 1965)은 스릴러 장르였고 무엇보다 뛰어난 미장센과 테크닉적인 면에서 찬사를 받았다. 영화의 기술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나.

=영화의 기술적 측면에 당연히 관심이 많다. 그런데 나에게 영화의 ‘기술’이라는 건 소설 속에 존재하는 문학적 매력과 일치한다. 좋은 문장, 좋은 형용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는 것.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미장센이다. 첫 번째 영화의 성공으로 여러 제안을 받다가 두 번째 영화를 했다. 필요한 만큼 여유를 갖지도 않았고, 조심성도 없이 그냥 만들었다. <쇼크 트루프>(Un Homme de trop, 1969)라는 제목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다룬 영화였다. 완전히 망했다. 관객 반응은 물론이고 평도 좋지 않았다. 바로 세 번째 영화인 <Z>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작업하려 들지 않았지만, 우선 배우들이 서서히 하겠다고 나섰다. 일종의 독특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그 누구도 <Z>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영화마다 각자의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고 어떤 반응을 받게 될지는 예측 불가능이다. 마치 개별적인 생명체처럼 각기 다른 삶과 운명을 살아가는 게 영화다. 몇년 후에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이 막을 내리자마자 <Z>를 가지고 배우 이브 몽탕, 시나리오작가 호르헤 셈프룬과 함께 그리스로 돌아갔다. 프랑스에서 성공한 직후 바로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당시에 인편으로 그리스의 수상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시 내각을 구성해 권력을 되찾고 국민투표를 할 테니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Z>가 국민투표 이후 그리스에서 개봉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기다렸다. 투표 결과 왕정이 끝나버렸고, 바로 그다음날 드디어 영화가 그리스에서 개봉되었다. 아주 놀라울 만큼 뜨거운 반응이었다. <Z>가 그리스에서 상영되는 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고 해야겠지. 그리스 역사를 다룬 영화였던 만큼 마음속에 우려도 있었다. 그리스 이야기를 하는데 프랑스 배우들과 프랑스어로 찍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이었다. 영화가 이미 군사독재정권 시절 동안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입소문이 났다고 해야 할까. 프랑스에서도 성공했고 칸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았고 오스카에서 상도 받았지 않나. 그리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엄청난 기대와 뜨거운 기다림이 있었고, 드디어 영화가 상영되면서 그 기다림에 응답한 모양새였다.

-<Z> 시나리오를 1968년 5월혁명 이전에 쓴 게 우연인가. 현실 상황과 절묘하게 시기가 맞았다.

=우리가 시나리오를 끝낸 게 1967년이었다. 군사독재정권을 위한 쿠데타가 그해 4월에 있었다. 당시에 우연히 책을 한권 읽게 되었다. 내용이 좋아서 호르헤 셈프룬에게 바로 이야기했고,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제작자를 기다렸다. 68년 5월혁명으로 우리 전부가 다 파업 상태였으니까. 첫 투자자를 만나서 바로 캐스팅을 준비하던 와중에, 혁명의 영향으로 모든 걸 멈추게 되었다. 파업이 완료되면서, 다시 영화 제작을 재개했다. <Z> 자체가 이런 상황에 다 참여했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우리가 기다렸던 종류의 영화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입소문이 나면서 그렇게 되었다. 영화와 그 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영화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또 다른 시각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려줬다.

-당신의 영화는 정치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이런 영화적 기조는 처음부터였나. 다큐멘터리 등의 장르에 관심이 있었던 적은 없었나.

=<Z>의 경우에는 관련된 자료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있었다고 한들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었다. 우리는 <Z>를 마치 우리가 직접 시위하고 항거하듯이 찍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 저항과 행동하는 움직임이 퍼져 있었고 다들 그렇게 정치적 의지를 표출했다. 사람들이 그리스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내가 호르헤에게 “내가 이걸 하겠다”라고 한 건, 시위하는 거야 정말 훌륭한 행위이지만 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이 영화가 성공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예산이 없어서 영화에 참여한 그 누구도 돈을 받지 않았고, 모두가 그걸 알면서도 이 영화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스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우리 영화인들이 영화적으로 저항하는 걸 선택했다고 해야 할까. 내가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픽션- 즉 ‘이야기’로 된 영화적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가 일종의 볼거리(spectacles), 오락적 요소를 갖춘 예술 장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한 걸 두고 사람들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영화관에 가는 건 일종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과 같다. 연설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지. 그러니까 이 모든 걸 만들 때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명확히 이야기의 전개가 보이도록 그렇게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고백>(L’Aveu, 1970)의 경우에는 우리에게 자료가 있었다. 런던에 있는 체코 출신의 친구들이 관련 자료를 가져다줬고 나도 자료를 갖고 있었다. 자료들에 기반해 새롭게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모든 영화들이 그렇지만 특히 다큐멘터리는 한계가 분명히 있는 장르다. 관객의 세계에 깊숙하게 침투하기에는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어려움이 있다. 이야기하는 형식이라면 좀 덜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 사람들은 그저 정치적 상황을 구성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고백>의 경우에는 반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모든 상황들이 하나씩 일어났고 꼬리를 물고 다른 상황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지.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기억되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현실에서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이어진다. 그리스가 유럽연합에 가입해 결국 지금은 보호국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나. 언젠가는 이 이야기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지만 영화는 현실을 따라가기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관통할 수 있어야, ‘이야기’로 거듭날 때 생명력을 갖는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고스란히 담아내겠다는 의도로 영화를 하면, 우선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종류가 너무 많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을 텐데 그럼 영화가 현실을 뒤따라가는 데 그치게 된다. 난 프로그래밍처럼 어떤 정해진 순서대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각자 다르게 인생의 다른 시점에, 꼭 필요한 의미를 지니고 나에게 다가왔고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번에 DVD 세트를 복원판으로 내면서 3시간짜리 인터뷰를 담은 것도 각각의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탄생과 그 과정은 마치 사랑의 그것에 비할 만하다. 각양각색의 사연을 통해 영화가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 과정이 너무 달라 단순하게 도식화시킬 수가 없다. <고백>의 원작을 내가 읽었을 때, 젊은 날의 기억이 밀려왔다. 조국의 정치적 상황, 정당이 생겨나는 와중에 아버지는 왕당파가 물러나기를 바라며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감옥에 갔다. 우리 가족이 치른 대가와 고등학교를 마쳤는데도 출신 성분이 불온해 대학에 갈 수 없는 현실에서 돈을 벌면서 프랑스로 오기만을 기다리던 상황, 그리고 프랑스에 도착해 시네마테크에서 꿈을 키우고 진짜로 영화를 하기까지…. 무엇보다도 1933년생인 내 세대가 바로 정당들의 약속을 처음 접한 세대 아닌가. 이상적인 현대 정치가, 좌파 정당들이 약속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공장 노동자의 삶이, 농부의 삶이 마치 천국과도 같아질 것이라고 말이다. 누군가가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하면 바로 “야, 너는 우파구나!”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동시에 우파들은 무엇을 했나? 알제리 전쟁을 일으켰고,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남미를 식민지화했다. 우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공공선’을 위한, ‘국익’을 위한 일이라면서 그들이 저지른 행위의 본질이 뭔지 깨닫는 순간에 현실은 ‘악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들 이미 너무 늦은 거다.

-당신의 영화들은 언제나 ‘정치’를 말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투쟁하는 영화’라는 평도 있다.

=영화로 정치와 권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영화가 ‘투쟁’하는 영화라는 표현에는 걸맞지 않다고 본다. 영화를 문화 ‘상품’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영화는 자동차가 아니다. 우리가 만약 자동차를 만든다면, 프랑스나 중국, 미국 등 생산 공장이 어디든지 그건 같은 제품이고, 그냥 ‘자동차’다. 우리가 이 나라들에서 영화를 만든다면, 그냥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 때 우리가 속한 사회와, 그 영토 속에 존재하는 개개인의 내밀한 삶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화를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완벽한 자유와 적절한 제작 환경이다. 이건 정부에서 보장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이미지로 문화적 자양분을 갖추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저 타국에서 만들어진, 다른 나라의 이미지만이 담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되겠나.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가 체결된 다음날, 당시 미테랑 대통령의 자문위원이었던 레지스 드브레가 할리우드에서 온 미국영화 관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신들, 프랑스는 정말 훌륭한 치즈와 샴페인, 요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락적 볼거리를 만드는 법을 알아요. 우리 각자가 그냥 잘할 줄 아는 걸 계속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 말해 너희 프랑스인들이 배 채우는 걸 만들어내면, 우리 미국인들이 머리 채우는 것을 만들겠다는 거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머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문화는 ‘이익’만을 논하는 경제적 관점에서 이야기되어질 수 없는 장르다. 배가 아니라 머리를 채우는 양식이기 때문에. 정치는 우리 삶에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으니 영화로 정치를 논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당원이 되거나 당적을 가진 적이 있나.

=단 한번도 없다. 그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셈이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난 친구들 몇몇이 나에게 “시위에 나가지 마!”라고 했다. 사실 나는 주로 시위 현장 바로 옆에 있는 비스트로에 머물면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내가 일종의 관객이었던 셈이고 그 덕분에 일어나고 있는 눈앞의 현실을 깊이 통찰할 여유가 생겼다. 그 거대한 군중에 들어가 무리에 속할 것인가, 그냥 ‘나’라는 개인으로 머무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당신과 공산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나 영화적으로….

=영화를 하며 제작부에 속한 공산주의자들을 만나고 함께 일하면서 그렇게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정말 열심히 일했고, 정직했으며 언제나 주어진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그들과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파업이 유일했다. 파업이 한번 시작되면 우리는 더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 얼마가 들어가든 상관없이 모든 걸 중단한다.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견디기 어려운 건 내가 ‘전세계 노동자들의 적’이라는 과장된 비난을 받는 일이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나는 누구보다 공산주의자들의 생각과 사상적 기반에 동의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좌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작업을 계속할 것인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대체 좌파가 무엇인지? 여기에 대답을 해야 한다. 선거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좌와 우를 구별해야 한다. 휴머니스트들이 믿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탄생했다가 성장하고 낡아가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결국 언제나 마냥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유럽연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조국인 그리스의 상황이 어렵다.

=‘하나의 유럽’, 국경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 라는 컨셉 자체는 훌륭하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공동체라는 개념이 ‘경제’를 최우선 순위로 삼은 탓에 이렇게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경제 대신에, 문화와 예술을, 교육을, 인간을 우선하는 공동체였다면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슬픈 일이다. 이제 정치가들은 더이상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있는데 유력 후보자 중에서 그 누구도 문화 정책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건 오로지 돈, 돈뿐이다. 나 역시 이미 오래전에 정치가들이 문화에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문화에 대해서 말하면 마치 돈 많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인 것처럼 그렇게 취급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의문의 실종>

-이 시대에 영화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나.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야기를 통해 강렬하고도 잊을 수 없는 소통의 경험은 물론, 역사 너머 숨겨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주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나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해준다. 우리는 젊은 여자의 벗은 몸을 영화에서 쉽게 본다. 지극히 평범한 이미지인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터부였다. 이 예술에는 오래된 법칙들이 있었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근사하게 남고 악당은 언제나 벌을 받으면서 영화가 끝나곤 했다. 이 법칙을 깨뜨리기 위해 많은 영화감독들이 노력해왔다. 중요한 건 검열이 아니라 자기검열이겠지. 감독이 스스로를 검열하는 것, 제작자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노출되면 모두가 알아서 길 수밖에 없다. 제작자 눈 밖에 나면 영화가 절대 개봉할 수 없을 테니까. 영상등급위원회의 검열에 대해서는 이제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감독이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두고 행하는 자기검열을 말해야겠지. 영화로서 저항하는 걸 애초에 포기한다는 건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

-학생 시절에 당신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영화는 무엇이었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탐욕>(1924)이었다.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이었다. 이렇게 끝나도 되는구나, 해피엔딩이 흔한 시절에 이렇게 비극적으로 이야기가 끝나도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구나, 싶었다. 관객으로 가득 찬 영화관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나는 모두가 이 영화에 반했다는 걸 알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장 르누아르는 물론 당시의 소련영화들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이 놀라운 영화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시네마테크 덕분이었다. 영화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새로운 수단이었고 나는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함께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의 연대도 시네마테크에서만 가능한 지점일 것이다. 시네마테크에서 나오면 보통 술을 한잔하러 갔고, 밤새 우리가 본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내가 이끌고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이제 100년을 넘겼고 그동안 많은 시네필의 요람 역할을 해줬다. 우리는 여전히 흔히 접할 수 없는 훌륭한 영화들을 소개하고, 관객과의 대화와 교육 프로그램, 전시를 기획해 매년 45만 관객이 이용하고 5만명의 어린이들이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만나 함께 호흡하고 돌아간다.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도 더 많은 시네마테크가 문을 열기를 바란다.

-이렇게 복원된 예전 영화들을 가지고 관객과 만나는 소감은 어떤가.

=내 영화가 만들어졌던 60년대에는 모두가 영화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현실에서 겪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세상이 나아져서 원래 지금쯤에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내 영화가 과거의 것이 되고, 별 의미가 없어야 역사가 진보했고 민중의 투쟁이 결실을 보았다는 증거일 텐데. 다른 의미로 우리가 그 시절에 겪었던 독재와 억압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실 나도 정말 궁금하다. 젊은이들에게, 2∼3세대 이후의 이들에게 내 영화가 어떻게 다가갈지. 우리 세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기기에 둘러싸여 자라난 세대들이 과연 어떤 질문을 할지 기대가 된다. 우선 영화관에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호흡하는지를 관찰하고 싶다. 질문에도 최선을 다해 답하면서 그렇게 내 영화가 젊은 세대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접점을 갖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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