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가 터득해야 했던 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면, 지금 현재 우리가 터득하고 있는 것은 외면을 넘어 ‘타자-세계를 파괴하는 기술’이다.” 최악이란 말을 쉽게 뱉을 수 없는 시대다. 불안과 공황은 일상이 되었고, 갈 곳을 잃은 무기력한 분노는 혐오로 표출되고 있다. 청년들은 가망 없는 ‘노오력’을 강요받고, 궤도를 이탈하면 언제든 빈곤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중·장년층이라고 예외는 없다. 마치 세계의 종말을 향하고 있는 듯한 한국 사회의 징후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걸까.
사회학자 엄기호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는 망가져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과 함께 나아가 사회를 복원시키기 위한 제안을 담고 있다. ‘1장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분노, 자책, 무기력으로 치닫는 개인의 내면과 순교자적 나르시시스트들이 늘어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돌아본다. ‘2장 리셋을 부르는 세상’에서는 보다 확장된 시선에서 존엄을 짓밟는 국가,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과 그 속에서 개개인의 각자도생이 중심이 된 사회를 분석한다. 하지만 파괴의 감정 곁에는 변화의 갈망 역시 함께 자리하고 있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3장 리셋을 넘어서’에 이르러 저자는 리셋이 아닌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저자는 안전은 결코 개인화될 수 없는 문제이며, 사회적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을 택할 때만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리셋이든 혁명이든 완성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경험해나가며 삶의 터전을 협력의 공간으로 재조직하자고 말한다. 송파 세 모녀 사건, 구의역 사고, 강남역 살인사건, 메르스 사태, 세월호 사건 등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는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이 함께한다.
망가져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서
무기력이 깊어질수록 세상을 리셋하는 것이 차라리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그것이 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상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예 현실을 날려버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즐거운’ 상상이 된다.(20쪽)
무-사유와 무-성찰성이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바우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의 무-사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제도다. (중략) 단순화해서 말하면 고도로 관료화된 현대 사회의 조직에서 ‘책임’은 최종 결과에 대한 책임, 즉 피해자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자기 상사에 대한 책임으로 뒤바뀐다. 일을 제대로, 제때 처리하지 못해 상관과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 그 일의 결과에 의해 벌어지는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대체하는 것이다. (중략) 이것을 바우만은 ‘도덕적 윤리적 책임’이 ‘기술적 책임’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책임이 기술적인 것이 되면 사람은 윤리적으로 둔감해진다.(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