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는 척추장애인이다. 어릴 때 등에 혹이 하나 있었는데, 집이 너무 가난하여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모친은 혹에 요오드를 바르며 밤새 마사지도 해봤고, 또 시골 의사의 조언에 따라 소년을 천장에 매달기도 했다. 하지만 혹은 더 커졌다. 그람시는 평생 질병과 그에 따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굶는 일은 다반사였고, 이에 따른 영양실조로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남들처럼 잘 뛰어놀지도 못했고, 결국 키도 150cm 정도에 머물렀다. 소년은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그람시는 혼자 책을 읽었다. 특히 토리노에서 군복무 중이던 큰형이 보내준 사회주의 계열의 잡지, 팸플릿 등은 그람시에겐 복음이었다. 사르데냐 섬의 시골에서 자란 그람시는 ‘붉은 도시’ 토리노로 가고 싶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장학금을 받는 것이다. 의사는 심한 공부는 건강을 더욱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그람시는 시험 준비에 독하게 매달렸다. 가난 때문에 하루에 겨우 한끼 정도 먹었는데,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책상 앞에 앉아 버텼다. 1911년 가을 그람시는 동경해 마지않던 토리노에 도착했고, 토리노대학 문학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나이 20살 때였다.
<베스트 오브 유스>에선 토리노대학 운동권이 주요한 소재로 쓰인다. 벽에 마오쩌둥 그림이 보인다.
안토니오 그람시, 토리노대학에 들어가다
이탈리아의 리노 델 프라 감독의 <안토니오 그람시: 감옥에서의 나날들>(1977)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자인 그람시의 말년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로카르노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 1926년 로마에서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체포된 뒤, 20년형을 선고받고, 이탈리아의 남단 투리(Turi)에서 보낸 감옥 생활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그린다. 정치범들이 주로 수감된 이곳에서 그람시는 동지들과, 또는 동지로 위장한 파시스트들과 토론을 벌이고 다투기도 하며, 자신의 생각을 더욱 가다듬는다. 모스크바의 변화에 민감하던 당시의 좌파들은 스탈린의 권력 장악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었고, 그람시는 그의 권력욕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동지들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 생각들을 기록한 3천 페이지 이상의 노트가 바로 그람시의 <옥중수고>다. 대략 1929년부터 건강이 악화돼 로마의 병원으로 이송되는 1935년까지, 투리 감옥에서 쓴 것이다(2년 뒤, 그람시는 46살로 병사한다).
사실 감옥 생활을 할 때, 그람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 토리노대학 시절에도 하루에 겨우 한끼정도 먹었다. 그람시는 단 하루라도 ‘두통과 현기증을 느끼지 않고 살기’를 소원했다. 수감될 때는 이미 이 12개가 빠져 있었고, 요독증으로 구토와 두통에 시달렸으며, 신경쇠약에 의한 발작 등을 종종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람시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폐병으로 각혈하는 순간에도 그는 기록에 매진했다. 사르데냐 섬의 착취받는 농부들을 보며 자랐고, 돈이 없어 학업을 일시 중단했던 11살 때는 하루 10시간의 노동도 경험했다. 미성년자 노동이 일상처럼 벌어질 때였다. 척추장애인이었던 그람시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밤새 침대에서 끙끙 앓다가, 다음날 새벽이면 다시 일하러 나가야 했다. 혁명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기적적인’ 수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옥중수고>는 그람시의 생명의 대가로 남은 결과인 셈이다.
감옥에서 그람시가 과거를 기억하는 장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역시 토리노에서 정치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때와 모스크바 인근에서 미래의 아내가 될 러시아 여성 줄리아 슈흐트를 만날 때다. 줄리아는 10대 시절 로마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이탈리아 말을 아주 잘했다. 그람시는 줄리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짧은 행복은 그가 옥중 생활을 할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이탈리안 잡> 속 토리노 시내인 카스텔로 광장 모습.
토리노,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
‘붉은 도시’ 토리노는 한때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라고 불렸다. 러시아의 왕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20세기 초 산업화에 따른 노동자 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됐는데, 그때의 도시 이름이 ‘페트로그라드’였다. 1905년의 비극적인 노동자 봉기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이 기억날 것이다. 이 도시는 레닌 시대 이후 ‘레닌그라드’로 개명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20세기 초의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체 노동자 운동의 상징이었고 이탈리아에서 토리노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페트로그라드’에서 1920년 총파업이 벌어질 때, 그 운동의 리더로 부각되며 이탈리아 좌파의 유력한 지도자로 성장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감옥에서의 나날들>은 이탈리아공산당의 창건자 그람시가 ‘붉은 도시’ 토리노에서 정치의 발판을 마련한 과정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 셈이다.
그람시가 토리노에 등장할 즈음에, 이 도시의 노동자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안토니오 그람시: 감옥에서의 나날들>은 혁명가 그람시의 삶에 초점을 맞춘 탓에 그를 지지하던 평범한 노동자들의 일상은 별로 소개돼 있지 않다.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장인인 마리오 모니첼리의 <동지들>(1963)은 바로 그 노동자들의 일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이탈리아식 코미디의 특징대로 <동지들>은 당대의 사회문제를 풍자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테마는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삶의 조건이다. ‘영리한’ 모니첼리답게 시대적 배경을 1960년대 당대가 아니라, 19세기 말로 잡아 민감한 논쟁을 살짝 피했다. 토리노의 섬유공장이 배경이다.
하루 14시간 노동에, 점심시간이 30분인 공장의 노동자들이 회사에 요구하는 것은 노동시간을 1시간 줄여달라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으로 동료 한명이 지친 나머지 기계에 부상을 입은 사고가 난 뒤다. 회사는 ‘더욱 집중하라’며 거절하고, 노동자들은 1시간 일찍 퇴근하는 부분 파업을 계획한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다가오자 아무도 용기 있게 기계 옆을 떠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노동운동가인 시니갈리아 교수(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다. 제노바 경찰의 추적을 피해 토리노에 왔던 그는 노동자들이 답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회의를 우연히 엿들었는데, 호기 있게 자신의 경험을 제안한다. “동지들! 당장 파업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파업이 길어지며 아무런 수입이 없게 되자, 노동자들은 동요하고 회사는 대체 노동자를 수급한다.
시니갈리아 교수는 동지들 앞에 다시 선다. “동지들! 공장을 점거하자.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피와 땀을 쏟은 이곳은 바로 동지들의 것!”이라며 말 그대로 피를 토하는 연설을 한다. 노동자들은 공장 점거에 나서고, 회사는 병력 요청을 하고,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피의 일요일 사건’이 상상되는 긴장감이 감돈다. 그런데 노동자와 병력이 충돌하는 사이, 소년 노동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영화의 엔딩은 대단히 비관적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14시간 노동을 채우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공장 앞에 줄을 서 있고, 그 가운데는 죽은 소년의 어린 동생도 보인다. 죽은 형이 ‘공장 노동자의 운명’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어렵사리 학교에 보냈던 동생이다. 이제 10살쯤 됐을까? 막 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눈을 껌벅이며 공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모니첼리의 <동지들>에 따르면, 토리노는 이탈리아 산업의 중심도시이자 동시에 노동자 착취의 도시로 남아 있는 셈이다.
19세기 말 산업화 과정에서 벌어졌던 노동자 착취의 역사는 현대에 와서는 어떻게 됐을까? 피아트 공장이 있는 부유한 도시 토리노는 이제 그 부가 노동자 계급에게까지 분배됐을까? 1990년대 이탈리아영화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인 잔니 아멜리오 감독의 <그들은 그렇게 웃었다>(1998)에 따르면 사정은 별로 나아진것 같지 않다. 영화의 배경은 ‘경제 성장의 붐’이 일던 1960년대다. <동지들>의 형제처럼, 여기서도 형(엔리코 로 베르소)은 무슨 일을 해서든 동생을 공부시키려 한다. 시칠리아 출신인 그는 자기처럼 문맹에, 아무런 기술도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운명을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형은 야채시장의 쓰레기를 비를 맞으며 밤새 치운 끝에 받은 돈으로 동생의 ‘비싼’ 책을 사주는데, 동생은 아쉽게도 공부에 매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동생은 혼자만 공부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학교에선 토리노 학생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동생은 차라리 형처럼 노동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공부에 매진할 것을 기대하는 형 앞에 철없는 동생은 그 ‘귀한’ 책을 땅바닥에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형은 그런 책을 한번 읽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책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으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을 것이다. 그런데도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책을 다시 집어들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닦으며, 오히려 동생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위로한다. 형은 동생을 더욱 좋은 조건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못할 짓이 없을 것 같은 독기를 품는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형제의 운명에 비극이 잉태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웃었다>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층민이 토리노에 적응하는 데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칠리아 출신 노동자들에겐 집을 빌려주지 않아, 형은 지하에서 겨우 침대 하나 얻어 잠을 자기도 한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에서 남부 출신인 로코의 가족이 밀라노의 반지하에서 겨우 셋집을 마련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사정은 영화가 발표된 1990년대 당대, 그리고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은 차별일 것이다. 형제들이 겪은 차별은 아마도 지금은 외국에서 들어온 노동자들이 주로 경험할 것 같다. 아멜리오 감독이 호소하는 것도 ‘형제애’라곤 없이 반복되는 차별의 부조리일 것이다(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이탈리안 잡>, 토리노를 병풍 삼은 케이퍼 필름
불행하게도 1970년대 이탈리아는 ‘테러의 땅’이었다. 극좌파인 ‘붉은 여단’이 보수정치의 리더이자 전 총리인 알도 모로를 납치한 뒤 살해한 사건이 벌어질 때다(1978년).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가 주로 로마에서 일어났다면, 경제인들에 대한 테러는 토리노에서 잦았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배우인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와 프랑스 전 총리 사르코지의 아내인 카를라 브루니 테데스키는 자매인데, 이들은 어릴 때 테러 위협 때문에 부친을 따라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이 토리노의 대표적인 타이어회사(CEAT)의 소유주였다. ‘붉은 여단’이 공개적으로 테러 위협을 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1970년대 초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처럼 1970년대 토리노에는 테러의 공포가 늘 감돌았다. 권력과 부를 서로 나누던 일부 보수 정치인과 자본가에 대한 분노는 대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컸는데, 이는 불행하게도 테러의 한 원인이 됐다.
시대적 상황이 그랬으니,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도 변해갔다. 마르코 툴리오 조르다나의 <베스트 오브 유스>(2003)에는 토리노 대학에 다니던 캠퍼스 커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남편은 의사로 성장하고 아내는 점점 정치적으로 돌변하더니 ‘붉은 여단’의 일원이 된다. 당시에 유행하던 ‘마오쩌둥주의’에 따라, 아내는 자본가와는 한치의 타협도 할 수 없다는 극단주의자로 변한다. 그런 혁명가를 둔 가정이 어떻게 변할지는 다들 상상이 될 것이다. 아마 그래서인지 조르다나 감독은 토리노 시퀀스를 찍을때 불행한 미래의 전조처럼 안개가 자욱한 ‘몰레 안토넬리아나’(Mole Antonelliana)를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탑처럼 하늘을 항해 치솟아 있는 이 건물은 토리노의 대표적인 상징인데, 그 상징이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지금 이 건물은 영화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토리노의 경제, 곧 부유함이 늘 비극적인 테마로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영화적으로 볼 때 토리노를 세계의 관객에게 알린 작품은 ‘케이퍼 필름’(도둑질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스릴러)의 고전인 <이탈리안 잡>(1969)일 것이다. 일단의 영국인 도둑들이 리더(마이클 케인)의 계획에 따라 토리노에서 한탕을 노리는데, 그 목표물은 중국 정부에서 피아트 회사로 건네지는 400만달러어치의 황금이다. 부자 도시와 자동차 도시라는 토리노의 이미지가 영화의 배경이 된 셈이다.
여기서도 토리노의 첫인상은 ‘몰레 안토넬리아나’로 보여준다. 하늘을 찌르는 건물은 권력의 도시 토리노의 상징인 것이다. 토리노는 이탈리아 통일왕국의 첫 왕도였다. 도둑들은 토리노 시내에서 황금을 훔쳐낸 뒤 경찰의 추적을 피해 이탈리아를 빠져나갈 작전을 짠다. 그래서 이들은 차들로 꽉 막혀 있는 토리노 시내 한복판의 ‘카스텔로 광장’ (Piazza Castello), 그리고 바로 옆의 ‘마다마 궁전’(Palazzo Madama) 옆을 지나가는데, 그러는 사이 토리노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드러나게 돼 있다. 옛 건물과 신식건물이 조화를 이룬 토리노는 한쪽에선 금방 ‘왕과 신하들’이 나올 것 같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또 다른 쪽에선 피아트의 ‘예쁜’ 차들이 그런 도시에 현대적인 매력을 섞어놓고 있다. <이탈리안 잡>은 도둑들의 수법도 흥미롭지만 그보다는 도시 토리노의 아름다움을 진정한 주인공처럼 그리고 있다. 덧붙여 토리노 외곽의 ‘그림 같은’ 알프스 풍경은 도시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선물일 것이다(토리노는 200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자 친구들>, 토리노 시내인 산 카를로 광장 주변.
<여자 친구들>, 체사레 파베세의 멜랑콜리
밀라노와 더불어 토리노는 이탈리아식 ‘아메리칸드림’의 도시처럼 보인다. 특히 경제 붐이 일던 1960년대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전국에서, 특히 일을 잡기 어려웠던 남부 이탈리아 출신들이 ‘꿈을 좇아’ 토리노로 몰려갔다.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첫걸음이었다. 게다가 ‘친퀘첸토’(배기량이 500cc란 의미), ‘세이첸토’(600cc) 같은 작지만 매력적인 소형차를 자가용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은 미래에 대한 꿈을 더욱 부풀게 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초기작 <여자 친구들>(1955)은 로마에서 토리노로 이주한 여성 디자이너의 정착기를 그리고 있다. 상층계급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클레리아(엘로오노라 로시 드라고)는 토리노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의 옆방에서 자살을 기도한 여성을 발견한다. 그를 구한 뒤, 클레리아는 회복한 그의 친구들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토리노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다. 세명의 여자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자유를 찾아 이혼을 고민 중인 최상류층 여성, 조각가로서 재능을 보이는 예술가, 그리고 남자를 만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자유분방한 여성 등이다. 자살을 기도했던 여성은 언제나 멜랑콜리한 기분에서 크게 변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을 여전히 불안하게 만든다.
<여자 친구들>은 토리노의 대표적인 작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파베세는 파시즘 시절 정부에서 암암리에 금지했던 미국 소설을 번역하고(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 결국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고, 전쟁 이후에는 도시인의 고독을 대단히 섬세하게 표현하는 매력 등으로 특히 젊은 독자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 파베세의 멜랑콜리한 소설 분위기는 안토니오니의 소외된 영화 분위기와 대단히 닮아 있고,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외롭고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된다. <여자 친구들>은 파베세가 ‘아름다운 여름’이란 제목으로 3부작을 묶어 발표한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이다. 순서대로 <아름다운 여름>(1940), <언덕 위의 악마>(1948), 그리고 <여자들 사이에서만>(1949)으로 구성돼 있다. <여자 친구들>은 <여자들 사이에서만>을 각색한 것이다(이 소설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나머지 둘은 번역됐다). 파베세는 <여자들 사이에서만>을 발표한 1년 뒤, 영화 속의 멜랑콜리한 여성처럼 좌절된 사랑의 상처를 비관하며 자살했다. 불과 42살이었고, 이런 사실은 그의 유명세를 더욱 높여주었다. 파베세의 팬들은 <여자 친구들>에서 실연 때문에 자살을 기도한 여성을 파베세의 작품 속 분신으로 봤다. 안토니오니의 <여자 친구들>은 파베세가 그린 토리노의 메마른 정서를 필름에 옮긴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다음엔 셰익스피어만큼이나 이탈리아를 좋아했던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이탈리아를 여행하겠다. 제임스의 대표 소설 <여인의 초상>을 각색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여인의 초상>(1996)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