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실세의 국정 농단과 증발한 VIP의 7시간과 늘 반복되는 정경유착의 짓거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입가경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사태의 초반부, 농담인 듯 진담처럼 들었던 얘기는 기획 개발 중이던 한국형 정치·권력 스릴러 프로젝트들이 전부 잠깐 멈췄다는 거였다. 현실이 픽션보다 황당하여 창작자들이 당황했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그간 시나리오에 너무 공을 들이고 있던 것은 아닐까? ‘꼭두각시 대통령 뒤에 무당 일족이 있었고, 비리의 증거가 될 단서는 그들이 보란 듯이 버려놓고 간 태블릿PC에 들어 있었다.’ 작가가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면 회사에서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퇴짜를 놓을 B급, C급 플롯.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네?
아무리 공들여 짠 스토리라도 눈 높은 관객이 보고 피식 웃어버리면 망하는 업계, 현실이 준 것은 경외감이 아니라 모욕감. 울화통 터진 민심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거의 매일 나오는 요즘 들려오는 소문은, 아예 이번 사태를 영화화한다는 것. 모든 것을 영화로 만드는 이 매체가 가만히 둘 소재는 아니다. 현실로 충분히 괴롭게 보고 있는데 뭐 하러?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접근하는 게 좋을까?
현실을 영화로 만들 때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뜨거운 냉정이고, 다른 하나는 차가운 동정(同情)이다. 전자는 사건에 집중한다.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으로, 오직 사실만을 가지고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현실의 폭로는 뚜렷한 목적의식과 사명감을 필요로 하므로 작가와 작품의 태도는 뜨거워야 한다. 후자는 인물에 집중한다.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한 인간에 대한 캐리커처를 위해 가능한 표현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며, 상상까지 동원한다. 그러나 그 인간을 인간 이상(이하)의 존재로 만들어서는 안 되기에 작가와 작품의 태도는 차가워야 한다. 뜨거운 냉정으로 만든 영화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재연해 보여준다면, 차가운 동정으로 만든 영화는 인물을 이야기로 가공하여 들려준다. 앞의 영화는 관객을 각성시키고, 뒤의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할 몫을 남긴다. 지금 이 세계에 대한 각성,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생각.
진실을 냉정하게 추적하는 <대통령의 음모>
앨런 J. 파큘라의 <대통령의 음모>(1976)는 백지에서 시작한다. 백지 위에, 타자기의 활자판으로 날짜를 찍는다. 잉크로 찍힌 날짜는 일어난 사실이고, 그래서 지울 수 없는 역사다. 이어서 TV 화면의 기록영상, 헬기에서 내려 국회에 들어선 대통령은 각료들과 함께 연단으로 걸어간다. 기립박수를 받으며 활짝 웃는 닉슨 대통령의 모습 다음의 컷은 어둠이다. 건조하게 오프닝 크레딧이 천천히 뜨고 사라지는 어둠 속에서, 짤깍짤깍… 몰래 열쇠를 따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건물에 수상한 남자들이 침입한다. 닉슨을 결국 탄핵과 하야로 몰고 간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다. 사건사고 담당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퍼드)는 워터게이트 호텔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한 좀도둑들을 취재하러 갔다가 뭔가 이상한 광경을 본다. 좀도둑들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자 ‘반공주의자’라고 대답하고, 또 전직 CIA 요원이었던 자가 끼어 있다. 뭘 훔치기엔 수중에 지닌 돈이 많다. 그들 수첩엔 백악관 특별 보좌관의 이름이 적혀 있고, 벌써 나타나 앉아 있는 피의자쪽 변호사는 질문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거 조사해봐야 해요, <워싱턴 포스트>에 입사한 지 9개월인 신참내기 밥이 물어온 요상한 사건을 편집부 데스크는 정치부로 넘기는 대신 밥에게 동료 기자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먼)을 붙여준다. 파트너가 된 둘은 권력의 음험한 진실을 밝히는 일을 시작한다. 이들이 딱히 정의로운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언론인이란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건과 취재 과정이 중요하므로 두 캐릭터에 관객이 감정적으로 파고들만한 개인적인, 감정적인 에피소드 같은 것은 보태지 않았다. 둘은 영화 내내 일만 하고 서로 일 얘기밖에 나누지 않는다. 취재도중 밥이 자신도 공화당 지지자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칼은 그때 처음 알았다는 듯 놀라서 그를 쳐다본다. 그러나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이입한다. 사건이 향하는 진실이 궁금하고, 그 세계에 자신들이 실제로 속해 있기 때문이다.
돈을 추적하라는 힌트를 줬던 익명의 내부고발자 ‘딥 스로트’는 말한다. “백악관에는 신들이 사는 게 아냐. 오히려 바보들이 많아서 골치지!” 워터게이트 침입자들이 가지고 있던 돈이 멕시코에서 세탁된, 닉슨의 재선 운동 본부에서 흘러나온 자금이었음이 밝혀진다. 이전부터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도청, 미행, 투서, 음해성 기사, 사생활 캐기 등 온갖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FBI나 검찰이 가만히 있는 이유를 아는 시점에서, 두 기자는 자신들이 찾는 진실이 백악관을 향하고 있으며 결국 대통령 빼고는 모두가 그의 부하(All the President’s Men)임을 깨닫는다.
놀랍게도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끝난다. 닉슨의 하야가 아니라 재선에 성공한 시점에서 끝난다. TV로 생중계되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가 성경에 손을 얹고 미국의 법을 준수하고 보호하겠노라 선서를 하며 축포를 쾅쾅 쏘아대는 동안, 책상 앞에 앉은 두 기자는 묵묵히 기사를 쓴다. 타자기를 찰칵찰칵 치는 소리가 포성을 덮으며 이후의 시간이 전진한다.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닉슨>
올리버 스톤의 <닉슨>(1995)은 일러두기와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지금부터 볼 영화가 ‘공개 자료와 불완전한 역사기록을 토대로 사건과 인물들을 극화했고, 일부 장면과 사건들은 혼합, 가정, 요약한 사실’이라는 전제. 그리고 인용문은 성경 구절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인가?”(마태복음 16장 26절)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는 몽타주로 휙 지나가고, 이미 곤경에 처한 몰락 직전의 권력자 닉슨(앤서니 홉킨스)은 백악관 안에서 두손에 위스키와 도청테이프를 쥐고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가 반추하는 자신의 지난 흥망성쇠는 온갖 콤플렉스와 그로 인한 편집증적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열등감과 질투의 대상은, 자신은 합격했지만 가난 탓에 갈 수 없었던 그 하버드를 나온 잘난 부잣집 아들 존 F. 케네디다. TV토론에서 밀린 탓에 대통령 선거에서 아깝게 졌던 그는 2년 후에 나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한다. 성자로 숭배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내에게 덧씌우며 그녀의 뜻에 따라 정계를 떠나리라 결심하지만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에서 미련은 원한처럼 남는다. 여기서 정말 관두었다면 그 자신의 정체를 아무도 모른 채 끝날 수 있었다.
그에게 다시 대권의 길을 종용하던 텍사스의 어느 재계 모임, 닉슨이 지금은 누구도 케네디를 이길 수 없다고 하자, 누군가가 수상쩍은 말을 한다. “64년 선거에 케네디가 못 나온다면?” 이 부분은 작가가 제기하는 음모론이지만 역사에서 케네디가 갑작스레 퇴장하자 닉슨에게는 정말 적수가 없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남는 의심. “아무리 선거에서 이기더라도 국민들은 케네디처럼 당신을 사랑하진 않을 거예요.” 자기를 의심하던 자가 권력을 쥐자 확신을 가지기 위해 하는 일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백악관 내부에 만들어진 대통령 직속의 정보국은 곧 자기 자신만의 제국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 이후 측근들을 하나둘 희생양으로 내보내는 그를 주변에선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어둠이라 주변을 어둡게 만들지.” 왜 모두들 자신을 싫어하는지 궁금해하던 닉슨은 영화의 결말부, 케네디의 초상화 앞에 서서 작가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에 대한 최대한의 인간적 동정심을 담아 대신 써준 깨달음을 입으로 말한다. “국민은 당신을 통 해 자기들의 이상형을 보지만, 나를 통해선 자기 자신들을 봐요.” 앞으로 만들어질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영화가 이 두 가지 접근법중 어느 쪽을 취하게 될지(뭐 어느 쪽도 아닐 수 있고), 그리고 그 영화화가 과연 의미 있는 작업이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기대하는 것은, 어떤 접근 방식으로든 작금의 이 사태로 만든 영화를 볼 즈음엔 우리가 어떻게든 이 현실을 통과해낸 이후일 거라는 것. 현실을 영화로 보면서 조금이나마 숨통 트이는 거리두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것. 그러니까 이 상상은, 우리의 출구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