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를 걷다가 잠시 멈췄다. ‘바디숍’이 있고, ‘고디바’가 있고, 그 사이에 박근혜가 있었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박근혜는 바디숍을 택할 수 있었고, 고디바를 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디숍만 택했다.
물론 이곳의 ‘고디바’는 벨기에산 명품 초콜릿 제조사의 서울 매장이며, 바디숍은 흔한 화장품 가게일 뿐이다. 그런데 달리 읽혔다. 고디바 때문이었다.
고디바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다. 11세기 잉글랜드 중부 코벤트리의 영주 부인 고디바는 몰락해 가는 농민들의 삶이 안타까워 남편에게 가혹한 세금 징수를 멈춰달라고 간청한다. 남편은 비웃는다. 당신이 진심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도시오! 고디바는 고심 끝에 영주의 제안을 따른다. 농민들은 감격한다. 그녀가 알몸으로 마을을 도는 동안 누구도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한 사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재단사 톰이 몰래 훔쳐보다가 걸려 두눈을 잃고 만다. 영주는 약속을 지킨다.
권력과 수탈이 있고, 퍼스트레이디의 진심과 헌신이 있으며, 약속과 ‘말’이 있다. 심지어 언론을 비유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피핑 톰’(훔쳐보는 톰)마저 있다. 이것은 박근혜 시대의 몰락지경을 읽는 열쇳말들이 아닌가.
박근혜는 고디바처럼 순수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 했다. 지금도 자신은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오직 국민사랑의 혼으로 마을을 도는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진심에 감격한 ‘박사모’들이 야비한 피핑 톰들의 눈알을 파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런데 고디바가 아니었다. 바디숍이었다. 순수의 혼이 아니라 탐욕의 몸뚱이였다. 피트니스 코치를 행정관으로 불러앉히고, 약잔치, 옷잔치를 벌였다. 이름도 외기 어려운 마취제, 비타민, 성형약물에 발기부전치료제까지. 국가와 결혼했다 했던가. 박근혜가 결혼한 건 박근혜였다. 루이 14세처럼 ‘짐이 곧 국가’였으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바디숍이 된 국가의 점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