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은 TV조선. 내 살다살다 TV조선을 보는 날이 다 오다니. 아침 시트콤을 보는 심정으로 우병우의 검찰 출두를, 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하는 장면을 본다. 호빠 출신과 무당의 조합. 그 날고 긴다는 문화계 황태자의 굴욕적인 호송 장면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한순간 놓치면 줄거리를 따라갈 수도 없는 급박한 전개다. 누군가가 그랬다. 가장 대중적인 시나리오는 익숙한 구조에 신선한 설정으로 탄생한다고. 대통령 임기 말에 습관적으로 터지는 측근 비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을 얻어 역대급 스캔들이 되었다. 임성한 드라마를 챙겨 보던 친구를 한심해하던 나에게도, 이것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성의 드라마다.
한때 열혈 영화청년의 정신을 되살려 난 분노를 뒤로하고 조용히 이 아침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해체/분석해본다. 눈앞의 반전을 위해 급급하게 만들어진 시나리오가 아니다. 치밀하게 초반부터 장치를 깔아둔 공이 많이 들어간 각본이다. 증거는 이 드라마가 무려 40년 전부터 시작됐다는 거다. 처음은 가정불화였을 것이다. 단지 아버지 마음에 안 드는 딸의 남자친구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가정이 대통령 일가였다는 것이고, 그 아버지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탄탄한 지지층을 만들어냈다는 게 또 하나의 문제였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탄생한 비련의 여주인공. 그리고 일가를 이룬 남자친구는 죽음 이후에도 그녀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보좌한다. 그리고 세대를 넘어, 그들은 콘크리트 같은 지지층을 딛고 한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비리와 부패를 자행한다. 언젠가 그 여주인공이 했던 고백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이 비극은 그 평범한 가정 안에서의 일로 끝났을 거다. 긴 세월에 걸친 엄청난 스케일이 무색하게, 하루아침에 콘크리트가 무너졌다. 형광등100개를 켠 듯 그녀에게만 집중됐던 조명이 뒷배경을 비춘 순간 여주인공은 공주님에서 초라한 패널 앞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다. 이 정도면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속 절름발이 정도는 쉽게 뛰어넘을 희대의 반전 캐릭터 아닌가.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두명의 캐릭터 문제도 아니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은 알고도 모르는 척, 은근슬쩍 꼭두각시놀이를 즐겼다. 정신 차려보니 이곳엔 정의라는 달달한 것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고 협잡꾼이 되지 않으면 멍청하다는 소릴 듣는 사기꾼의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믿기 힘들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이다.
뉴스는 시트콤이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대하드라마도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나는 그들을 팔짱 끼고 구경할 수 있는 TV 밖 시청자가 아닌, 그들에 의해 상식과 삶과 가치를 배신당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때문에 즐거울 수 없다. 남의 일처럼 웃으면서 조롱할 수 없다. 도무지 분노하지않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만약 이게 진짜 드라마라면 클라이맥스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난 이 드라마가 끝나지 않길 기도한다. 최소한 여주인공의 퇴장으로 끝나버려선 안 된다. 망가져버린 이곳의 가치와 상식이 제대로 서는 모습까진 무조건 연장방영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분노를 잃지 않고 지켜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