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소설가 델핀은 막막한 상황에서 자주 아이처럼 처신해버리는, 키만 큰 어른이다. 그런 그에게 분신 같은 친구가 생긴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L은 겉모습은 다르지만 취향이나 본성은 델핀 자신과 꼭 닮은 인물. 델핀은 자신보다 어른스런 L의 지지와 보호에 점차 길들여진다. L은 델핀의 모든 선택을 지지하지만, 차기작만큼은 생각이 다르다. 픽션을 쓰고 싶어 하는 델핀과 달리 L은 델핀이 실화, 그것도 자신의 경험담에 기반한 소설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L은 단호함을 넘어서 숨겼던 광기를 드러낸다. 글쓰기가 두려워진 델핀은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고, L은 델핀의 역할을 서슴없이 대신한다.
매혹, 우울, 배신. 3부로 나뉜 책의 구성이 암시하듯, 델핀과 L은 실패한 관계의 경로를 따른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실패로 단언하기엔 지나치게 생산적이다. 델핀의 관점에서 L은 적과 동지, 어느 쪽으로 단정 짓기 쉽지 않다. 이런 모호함으로 L이란 캐릭터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실화를 바탕으로>엔 이처럼 경계 지을 수 없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소설의 도입부엔 미스터리 장르의 전형대로 주인공에게 절체절명의 사건이 닥친다. 하지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두 인물이 사랑과 우정의 미묘한 경계를 오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서정소설로 성격을 달리한다. 후반부에선 미스터리가 몰아치며 다시 추리소설의 자장으로 회귀한다.
픽션과 실화 문학 사이에서 소설을 규정하기도 쉽지 않다. ‘델핀’이라는 캐릭터의 이름부터 파리에 사는 이름난 소설가라는 점이며 문학 저널리스트인 남편과 독특한 생활방식을 공유하는 점이며 전작의 성공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는 점까지 델핀이란 캐릭터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다. 문학에서 현실과 허구라는 재료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실화를 바탕으로>는 소설 자체가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적이냐 동지냐 나 자신이냐
나는 현실로 충분하다고 믿진 않아. 현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재구성할 수 있어야해. 네 말대로 현실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변화되고, 해석될 필요가 있어. 소설가의 시선과 관점 없이는 아무리 잘 풀려봐야 죽도록 지루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엔 엄청난 불안을 야기하지. 그리고 어떤 재료에서 출발했던 그 작업은 언제나 픽션이라는 형태야.(273쪽)
내 관심을 끄는 건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지고 만들어졌는지 이해하는 거야.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이 어떻게 우리 침에 섞이고 살갗 밑으로 퍼져 완전히 내부로 흡수되는 걸까? 어떤 것들은 신발 밑창에 끝끝내 껄끄러운 돌멩이처럼 남아 있는데 말이야. 무사히 어른이 된 줄 아는 우리의 살갗에 남은 어린 시절의 흔적을 어떻게 해독하지? 보이지 않는 그 문신을 누가 읽을 수 있지? 그건 어느 나라 말로 적혀있지? 우리가 감추고 있는 그 상처를 누가 이해할 수 있지? 난 이런 데 관심이 있어.(3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