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밝혀지는 날들이다. 사과문이 올라오는 날들이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나지 않은, 끝나서는 안 될 날들이다.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올라오는 글들은 양적인 면에서는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지난 열흘 동안 올라오는 거의 모든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그동안 누적된 나의 모든 무지와 묵과가 역시 죄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완전히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모른다고 믿었다. 불쾌한 상황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나만 처신을 잘하면 된다고 믿었다. 편리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죄를 가려주는 믿음이었으므로. 그러나 “모를 수 있다는 것도 권력”이라는 말 앞에서 나는 그간의 허술한 믿음 체계가 마침내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삼 내가 처한 위치와 조건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소설가이며, 문예창작학과 강사이고, 1인출판사 운영자이고, 가해 지목인의 친구이고, 피해자의 친구이며, 무엇보다 여성이고, 이러한 처지와 입장들로 인해 때로는 가해자이고, 때로는 피해자이며, 때로는 목격자이고, 때로는 방관자가 되었다. 이런 조건들이 마음속에서 끝없이 충돌하고 또 충돌하면서 처음 며칠간 일종의 판단 불능 상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즉각 판단해야 했다. 이러한 시의성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 결정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이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결정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걸 알게 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작품이 훌륭하다고 믿어지는 경우, 이 질문에 답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이제껏 나는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유보해왔지만 지난 며칠 동안 확실해진 것이 있다. 어쨌거나 훌륭한 예술을 하는 데 도덕적, 윤리적 흠결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면(이렇게 말하는 멍청이들이 있다), 그래야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면, 그런 예술은 필요 없으며 나는 예술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단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더 세심하고 사려 깊게 듣고 알리고 돕는 것이 나라는 개인의 책무이리라는 것도. 더는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지난 며칠간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준 분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이게 끝이 아닐 것이다. 고발의 끝도, 한국문학의 끝도. 전자의 끝이라면 당연히 끝나지 않았으며, 후자의 끝이라면 새로운 이름들로 새로운 토대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더 좋은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