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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SF와 페미니즘
이다혜 2016-11-07

<혁명하는 여자들> 조안나 러스, 팻 머피 외 지음 / 아작 펴냄

조안나 러스를 비롯한 여성 SF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혁명하는 여자들>은 SF이기 때문에 가능할 상상력으로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런데 무엇이든 시도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여성이라 받는 제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에 맞부딪힌다. 이 단편집에는 2인칭으로 쓰인 소설들이 있다. “너는” 혹은 “당신은”이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읽는 독자에게 던지는 강력한 암시다. 당신이 이 상황에 (구겨)넣어져 있고 거기서 도망가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여자주인공이 2인칭으로 칭해진다는 데는 또 한 가지 뜻이 있을 것이다. 여자는 ‘나’로 정체성을 찾고 확고하게 만들어가기보다 ‘너’로 규정지어진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교육받는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너’의 틀 안에 있기를 요구받는다. 스스로의 외모를 평가하는 기준은 밖에서 온다. 말이나 행동의 규범 역시 그렇다.

이 책에 실린 2인칭 소설들은 다른 소설들에 비해 유난히 서글픈 감정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그 한 작품이 수전 팰워크의 <늑대여자>다. “시간이 문제였다”라고 시작하는 <늑대여자>의 주인공은 한달에 네댓새(평균적인 생리기간과 일치한다) 늑대로 변신하는 늑대여자다. 네가 조너선을 만난 것은 열네살 때였다. 두발로 쳐서 열네살, 네발로 치면 고작 두살이었다. 조너선은 열네살짜리처럼 보이면서도 더 나이 든 행동을 하는, 길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한달에 사흘에서 닷새까지 보름달이 뜰 즈음에 야생을 드러내는 소녀와 섹스하는 걸 아주 즐겼다. 변신을 하느라 아픈 몸을 달랠 수 있도록 물병 두개에 뜨거운 물을 채워와 통증을 달래주고는(이 역시 생리통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하다) 대대적인 섹스 파티를 했다. 늑대로 변신한 동안에는 제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그의 개로 함께했고, 인간의 모습이 되면 스텔라라고 불렸다. 너는 늑대였으므로 다른 개들과 있을 때 알파로 군림했고, 조너선은 너의 알파였다. 하지만 인간과 늑대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너는 점점 더 빠르게 나이 들었다. 조너선이 마흔이 되었을 때 너는 마흔아홉이 되었다. 그가 마흔하나가 되는 사이 넌 쉰여섯이 되었다. “섹스는 대체로 주요 국경일과 겹치게 되었다.” 노화와 더불어 지혜는 깊어졌다. 하지만 넌 조너선이 지혜 때문에 너와 결혼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둘의 관계는 상호적인 적이 없었다. 한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균열을 무시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너에게 알파로 군림하는 그가 등을 돌려버렸을 때 너는 아무것도 수습할 수 없다. <늑대여자>가 ‘색다른’ 여성과의 섹스를 탐하는 남자(들, 복수로도 쓸 수 있는 이유는 조너선의 동료들이라고 해서 ‘색다른’ 너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와 종속적인 관계를 지속한 끝에 오는 파국을 차갑고 서글프게 보여준다면,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2인칭 소설, 히로미 고토의 <가슴 이야기>는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하면서 부부간에 생기는 일을 그렸다.

“당신들은 이제야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던 탓에 당신들이 옛날 어머니들과 똑같은 지랄 맞은 강에 똑같이 노도 없이 똑같은 배에 탄 신세가 됐다는 걸 깨닫는다.” 모유 수유라는 신화에 갇힌 여성이 겪는 어려움이 <가슴 이야기>의 가장 큰 갈등요소다. “여자들은 여자들이 있었던 이래로 내내 모유 수유를 해왔어.” 남편은 쉽게 말한다. 시어머니는 자신과 큰 손주가 먹을 점심을 만들지만, 당신이 좋아할지 어떨지 몰라서 당신이 먹을 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젖이 너무 가득 차서 아프다고, 잠들 수 있게 조금 빨아달라고 남편에게 말하자 그는 기겁한다. “너무… 근친상간 같아.” 아이가 울면 시어머니는 아이를 달래며 말한다. “금방 젖이 올 거야.” 당신은 당신에게도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은 ‘젖’이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러고 싶을 뿐 그냥 가만히 있는다. 남편은 당신의 고통의 호소를 듣고는 말한다. “내가 젖을 먹일 수 있다면, 난 기꺼이 먹일 거야!” 소설의 엔딩은, 육아의 고통을 겪는 여성이 한번쯤 상상해보았을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미래사회를 상상하고, 신화를 다시 쓰기도 하며, <혁명하는 여자들>에 참여한 작가들은 당연하다고들 하는 남녀를 둘러싼 질서에 대해 묻는다. 많은 경우, 결말은 아주 멀리까지 뛰어오른다. SF와 페미니즘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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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페미니즘 <혁명하는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