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1월, 거대한 장원을 지닌 윌리엄 맥코들 경(마이클 갬본)은 친척과 친구들을 자신의 저택 고스포드 파크로 불러들여 호화판 사냥 파티를 연다. 파티엔 그의 처제인 트랜섬 백작 부인(매기 스미스), 사업가인 동생 조지 부부, 1차대전에 참전한 전직 대령인 헨리(라이언 필립), 미국의 영화 제작자인 와이즈먼(보브 밸러번) 등 이른바 ‘상류사회’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상류사회 인사’란 일거수일투족을 하인에 의지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자기 손으로 음식을 준비하거나 옷을 빨거나 자동차 문을 연다는 건 상류사회의 성원이 될 자격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의 행차엔 반드시 하인이 동행한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최근작 <고스포드 파크>(2001)는 윌리엄의 저택에 모인 상류층 인사와 그들의 하인 등 30여명의 인간군상을 통해 세상의 축소판을 보여준다. 상류층 인사들이 저택의 위층에서 호화스런 만찬을 벌일 때, 하인들은 아래층에서 주인의 옷을 다리거나 식사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인들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기 이름 대신 주인의 이름으로 불리고, 식탁 자리도 주인의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어머니가 쓰러져도 집으로 달려갈 수 없는 이들은 “자기 삶이 없는 존재”들이다. 손님들은 낮엔 광활한 숲에서 사냥을 즐기고 밤엔 성대한 만찬을 즐긴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사냥이나 만찬을 즐기는 덴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제각기 엄청난 재산가인 윌리엄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찾아온 것일 뿐이다. 트랜섬 백작 부인은 윌리엄이 자신에게 보내던 정기적 용돈을 중단하려는 걸 막기 위해 왔고, 사업가인 조지는 윌리엄이 투자 자금을 회수하지 않도록 하는 게 최대의 목표다. 그날 밤 성대한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이 티타임을 즐길 때 혼자 서재에 들어갔던 윌리엄은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다. 수사관이 도착해 조사한 결과 윌리엄은 두 번 살해당했다. 먼저 독살당해 이미 죽은 그의 심장을 다른 사람이 한번 더 흉기로 찌른 것이다. 윌리엄이 죽자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 죽여 “그의 죽음이 우릴 파산에서 구했다”고 환성을 올린다. <고스포드 파크>는 전형적인 ‘밀실 살인 미스터리’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저택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은 저마다 살해동기를 한 조각씩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해야 했던 증오의 씨앗은 전혀 엉뚱한 데 뿌려져 있었음을 더디게 드러낸다. 영화는 잘 짜인 추리극에 머물지 않고, 위층과 아래층의 얽힘을 통해 계층의 벽으로 나뉜 사회를 풍자한다. 영화는 멀리서 봤을 때 우아하기 그지없어 보일 상류층의 파티장 깊숙히 파고 들어가 그들의 속물적인 대화를 낱낱이 들려준다. 관객은 이들의 대화 사이사이에서 이른바 ‘상류사회’란 유한계급들이 과거의 거대한 유산을 뜯어먹으며 유지되는 것이라는 야유의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릴 것이다. 이미 <플레이어>와 <숏컷> 등의 작품에서 파노라마처럼 다양한 인간상을 통해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탁월한 연출 솜씨를 보여온 알트만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구체성과 개연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계층사회의 전형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12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