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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사기꾼의 도(道)

<아메리칸 허슬> <검사외전>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으로 본 사기꾼의 도(道)

<아메리칸 허슬>

내 동생은 캐나다 어학연수 중에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그 남자는 허세와 잔소리가 심하고 말이 많은 경상도 남자였다. 이쯤 되면 짐작할 거다. 영어 배우러 간 캐나다에서 1년 동안 한국말을 얼마나 많이 하며 살았을지.

한국에 돌아온 동생에게 나는 영국 출장에서 녹음한 인터뷰 파일을 건넸다. “한국어로 번역해서 풀어줘, 빵 사줄게.” 옆에는, 나한테는 틈틈이 삥을 뜯으면서 동생한테는 1년 연수 비용을 대준 엄마도 있었다. 동생은 당황했다. 하지만 몇분쯤 듣더니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이거 영국식 영언데? 나는 미국 영어 배워서 못 알아들어.” 머리를 굴리기는 했다만 동생아…. “그 사람 미국 사람이야, 영국에서 만났을 뿐. 그리고 너 억양이 이상해. 캐나다에서 영어는 못 배우고 경상도 말만 배워왔구나.” 동생은 울면서 언니가 괴롭힌다고 엄마한테 이르러 갔다.

그 몇달 후 제부는 취직은 하지 않고 1년간 미국식 영어를 배웠으니 이제 영국식 영어를 배우러 영국에 가야겠다고 했다. 왜, 영국 가서 연예인 하게? 로버트 할리처럼? 호주 출신인 배우 휴 잭맨은 할리우드 가서 배우 하느라 억양 연습 열심히 해서 못하는 영어가 없다고는 하더라만(아니, 연습 안 해도 이미 잘하지만), 넌 그냥 표준어나 배워, 영어는 안 되겠어.

철없는 동생 부부를 무자비하게 비웃기는 했지만 아메리칸 잉글리시와 잉글리시 잉글리시는 엄연히 다르며 일부 영역에 있어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어디에? 사기에. (그러고 보니 잉글리시 머핀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오타 잡았다며, 영국 머핀이니까 잉글랜드 머핀 아니냐며 매우 좋아하던 동료가 생각난다. (나름 출판계 종사자….) 그러게 말이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도 <잉글랜드 페이션트>라고 할 걸 그랬네.)

FBI가 실적 올리려고 사기꾼들한테 사기 쳐서 약점 잡은 다음 다른 사람한테 사기 치고 오라고 보냈더니 그 사기꾼들이 도로 FBI한테 가서 사기를 치는 뫼비우스의 영화 <아메리칸 허슬>은 영어의 억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월급 받아서는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시드니(에이미 애덤스)가 사기꾼이 되고자 가장 먼저 익힌 스킬이 영국식 억양이다. 그에 어울리게 이름도 이디스라고 바꾸고. 시드니와 이디스, 이름부터가 변방과 중심 같잖아?

<검사외전>

하지만 억양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억양을 제대로 구사하는 거다. <검사외전>의 사기 전과 10범 한치원(강동원)은 표준어를 쓴다고 쓰지만 경상도 출신임이 분명한 억양으로 전라도 출신 검사에게 접근해 TK를 욕하는데, 그게 먹힌다, 놀랍다. 이 경우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경상도 억양으로 표준어를 하는 배우? 전라도 검사 무시하면서 TK만 욕하면 만사형통으로 넘어온다고 믿은 감독? 아니면 저렇게 말도 안 되고 단순한 사기가 통하는 장면이 필연적인 메타포로 작용함으로써 부패하고 무능한 대한민국 검찰을 풍자하고자 하는 감독의 심오한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관객?

근데 나이 서른둘에 사기 전과 10범이라는 건 얘가 그만큼 사기를 못 친다는 얘긴데, 아무리 감옥에서 5년 보내느라 뾰족한 대안이 없어도 그렇지, 변재욱 검사(황정민)는 이런 애를 뭘 믿고 승부를 거는 걸까? 얘는 자기가 한달 전에 한 거짓말도 기억 못한다고. 이 경우 책임은 누구의 몫… 아, 그만해야지.

<그녀를 믿지 마세요>

이처럼 사기를 치는 데 있어 연기력과 기억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타고난 사기꾼 주영주(김하늘)를 보라. 결코 감정을 분출하지 않으면서 억누르는 연기력과 더불어 아줌마들이 전후 맥락도 없이 떠드는 수다를 그대로 기억했다가 결정적인 정보로 활용하는 암기력을 자랑한다. 사기 치려는 마음을 먹기도 전에 이미 사기 대상의 정보를 수집하는 준비된 사기꾼 주영주, 약혼자라고 사기 치는 동네 약사(이자 온 동네 호구) 희철(강동원)과 어떻게 만났는지 질문을 받자마자 인터넷 로설 수준의 스토리에 명대사까지 덧붙이는 임기응변의 달인. 그녀는 말한다, 거짓말엔 창의성이 중요하므로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고. 사실 영화 시나리오에도 창의성이 중요하긴 한데… 아, 진짜 그만해야지.

<범죄의 재구성>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기 치는 대상이다. <범죄의 재구성>은 이렇게 말한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와중에 부모를 잃고도 어엿하게 조선 최고의 나쁜 놈으로 자수성가한 <봉이 김선달>의 성대련(조재현)이 그답지 않게 강물에서 금덩어리를 건져내는 걸 보고도 사금이라 철석같이 믿는 것도 대본의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문제라고 치자. 사금의 사는 모래 사(砂)라는 걸 모를 수도 있지, 뭐. 한자 1천자 외우는 게 기본이던 그 시대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영국의 사기꾼 아서 퍼거슨은 20세기 초반 런던에 놀러온 미국 관광객을 상대로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주와 버킹엄궁전, 빅벤 등을 팔아치웠다.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온 미국인들을 상대로 어떻게? 영국 정부의 채무를 갚아야 한다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지어내서… 는 무슨, 영국 정부가 빚 갚으려고 버킹엄궁전을 팔아치운다는 사기가 그럴듯할 리가, 그냥 주택담보대출 받으면 될 텐데… 도 아니겠구나.

어쨌든 땅이 넓어 마당도 넓은 미국인들은 그 마당에 그럴듯한 기둥 하나 세워두고 싶었을 거다. 그런 기둥이 들어갈 마당만 있어도 좋을 텐데, 저런 번듯한 기둥 있다면 더 좋겠고, 그다음엔 균형이 맞게 반대쪽에 시계탑 하나 들여놓으면 더 좋을 거고…. 이미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그칠 줄 모르는 욕심이 사람의 눈을 가리고 사기꾼을 부른다. 다시 한번 <범죄의 재구성>을 인용하자면 “상식보다 탐욕이 큰” 자가 사기를 당한다.

방심하지 말 것

서로 등쳐먹는 세상, 그나마 등치는 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두세 가지 준비 사항

<필립 모리스>

체력 관리

죽다 살아나 왠지 모르게 사기꾼으로 갱생한 <필립 모리스>의 스티븐(짐 캐리)은 슈퍼마켓 바닥에 식용유를 뿌리고 고난도의 낙법을 구사하여 보상금을 받아낸다. 반년 동안 한번에 30분 이상 걸어본 적이 없는 나였다면 뻣뻣한 일자 척추가 받은 충격으로 인해 그 보상금을 고스란히 병원비로 갖다바쳤을 텐데. 세명으로 구성된 <시체가 돌아왔다>의 사기단도 발목 묶고 뛰기로 추가 1억원이 걸린 승부를 가른다. 젊다고 자만하던 김옥빈, 나이가 관리 못 따라가는 거다.

<봉이 김선달>

외모 관리

인상착의가 그냥 “제일 예쁜 여자”인 <카운트다운>의 차하연(전도연)은 “예쁜 여자가 작정하고 끼까지 부리니” 현금 170억원을 30분 만에 모은다. 대통령 친구보다 빠른데? <봉이 김선달>의 김선달 김인홍(류승호)도 보송보송하게 피부를 관리한 덕에 여자로 분장하고는 멀쩡한 남자의 혼을 빼놓는다. 김선달네 사기단 중에는 여자 라미란도 있는데 남자 후리려고 남자를 보내다니, 사기를 치려면 성형이 필요하고 성형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사기를 쳐야 하는데 그 사기를 치려면 성형이 필요하고….

<검사외전>

증거 관리

영국이 낳은 최고의 사기꾼 아서 퍼거슨은 고객과 기념사진 한장 찍었다가 덜미를 잡힌다(하지만 몇년 살고 나와서 부유한 은퇴 생활을 즐겼다고). 무심코 찍은 사진 한장이 사기꾼의 평생을 좌우한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검사외전>의 우종길(이성민)은 지나가던 자원봉사자(강동원)랑 찍은 사진 한장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하여 쇠고랑을 차는데…. 누가 봐도 모르는 사람이 유명인이랑 셀카 찍은 걸 증거로 채택하다니, 이 또한 허술하고 무능한 대한민국 법조계를 향한 비판과 풍자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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