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영화웹진 ‘네오이마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당시 편집장이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신임 에디터에 대해 성폭력 혐의를 받았지만, 결국 검찰의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다. 명백히 악법이라고 생각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문제와 증거에 대한 공방이 피해자를 괴롭혔다. 가해자가 명예훼손이라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누가 봐도 알 만한 증거를 들이대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후 가해자는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됐지만, 그 어떤 사과도 없었다. 더 불쾌했던 것은 지인들과 함께 에디터로 일했던 사람들의 태도였다. 난처해서 가만있는 사람들은 그냥 양반이었다. 당시 편집장을 두둔하던 에디터가 모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가는 것도 봤고, 역시 그를 두둔하던 모 감독도 여전히 영화를 잘 만들고 있다. 그렇게 다들 어떻게든 연명하고 있다. 그들 또한 사과나 반성의 말 한마디 없었다.
가장 먼저 트위터를 통해 알렸다시피 <씨네21>도 최근 SNS상에서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지칭된 김수 평론가를 둘러싼 법적 사건이 진행 중이다. 제보는 오래전에 있었지만, 역시 그 사실적시 명예훼손 문제 때문에 피해자 몇분이 실명을 포함한 공개적 입장 표명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이번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비춰진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그 지인들을 통해 ‘김모’씨로 짐작하던 것을 넘어 실명이 오르내리게 됐다. <씨네21>로서도 입장 표명을 더 미룰 수 없었던 데는 그런 분위기 탓도 있지만, 가해자측의 태도를 고발하기 위함도 있다. 저열하게 명예훼손을 무기삼아 가해자와 몇몇 관련자가 공론화를 못하게끔 압박했다는 얘기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됐고, 또한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최근 어렵게 용기를 내어 고백과 폭로에 나선 사람들을 보면서 새삼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문제만큼이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후 성폭력 인지’에 대한 것이다. 제보자들의 사례를 보면 하나같이, 사건이 있었을 때는 권력관계상 상위에 있는 자에게서 느꼈던 심리적 위축, 혹은 강요된 착각의 합의로 인하여 고발이나 고소의 시점을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처럼 나중에 스스로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경우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온갖 사례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법의 성격상 어쩔 수 없겠지만, 이른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피해자들’ 스스로 성폭력으로 규정하기까지 그만큼의 고통의 시간이 들어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누군가의 조언이나 학습을 통해 비로소 용기를 내기까지 혼자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래서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다.
<씨네21>로서는 공지 이후 보다 책임감 있게 후속 보도를 해야 함을 느끼고 있다. 일단 이번호에서는 이예지 기자가 경과 정리와 더불어,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영화계 내 성폭력에 대한 환기 차원의 뉴스 기사(포커스 16∼17쪽)를 썼다. 추후 여러 다른 기사들이 계속될 것이다. 제보는 es@cine21.com 메일로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