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아무리 길어올릴지라도 ‘나(너)’는 결코 고통받는 ‘너(나)’가 될 수 없다. 네 고통의 곁에 내가 아프게 선다는 건 서로가 다른 좌표에 있음을 깨닫는 일과도 같다. 하지만 묻자. 그러면 그것은 괴로움이 아닌가, 고통이 아닌가. 치사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당사자의 고통과 공감자의 고통을 비교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을 것이고, 야비하게도 사람은 자신이 아플 때 가장 아프다. 아픔은 이기적인 구석이 있다.
가끔 거울을 본다. 세월호 참사가 몹시도 힘들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나, 단원고 학부모들이 나와 엇비슷한 연배라는 사실을 빼놓기 어렵다. 우리집에는 고등학생이 산다. 그들의 집에도 고등학생이 살았다. 그 또래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그 또래의 아이를 잃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지, 답 없는 물음이 여전히 머리를 맴돈다.
약품을 얼마나 처넣었는지 알 수 없는 하얗고 매운 물줄기가 레이저광선처럼 직사되던 밤, 늙은 농부 백남기가 휘청거릴 틈도 없이 쓰러지던 그때, 나도 거기에 있었다. 누군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비보가 퍼진 뒤에야 사납던 물줄기가 수그러든 밤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 연배였다. 힘겹게 버티다 317일 만에 돌아가셨다.
명확한 죽음의 원인을 부검으로 덮으려는 검경이 시신을 빼앗으려 달려들던 피말리는 4박5일, 장례식장을 오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세대는 미래를 잃어버리고, 과거를 살해당했다. 추하게 살아남았다. 원치 않았다는 변명이, 크나큰 상실감이 우리를 책임에서 자유롭게 하는가.
아이들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서 흐느끼던 세월호 유족이 이제 아비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 서 있다.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치욕적이게도 산 자만이 아픔을 느낀다. 우리에게 나을 의지가 있는 걸까. 이 아픔은, 분노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