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 동안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은 여자. 저자 에머 오툴은 이 요상한 수식어와 함께 유명세를 치렀다. TV 아침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무성한 겨드랑이털과 다리털을 만천하에 공개했던 것. 하루아침에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토픽감이 되었으나 이것이 편견에 맞서는 그녀의 여러 실험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 실험이란 요컨대 ‘남자는 해도 되는데 여자는 왜 안 돼?’에 관한 내용이었다.
연극학자이자 페미니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에머 오툴은 18살 무렵에만 해도 결혼해서 살림하고 애 낳아서 기르는 일 또한 엄연한 여성의 선택이라 주장하며 어느 페미니스트와 논쟁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란 단어가 함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흔히 여성적이라 불리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골랐을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의 실험은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19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핼러윈데이에 남장을 하고 줄곧 남자인 양 행세하는 실험부터, 삭발, 누드모델, 제모 중단, 성별 대명사 안 쓰기, 나아가 성정체성의 경계를 넘는 모험까지. 그저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했던 유희적인 실험들은 대개 만만찮은 벽과 마주쳐야만 했다.
개인의 실증적 사례연구를 통해 역지사지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가운데, 이를 주디스 버틀러, 나오미 울프, 피에르 부르디외 등 선배 학자들의 이론과 개념을 빌려 고찰한다는 점에서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은 페미니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거기에 저자는 실험 과정에서 느껴야 했던 수많은 딜레마들도 가감 없이 실토한다. 실험 마지막 단계는 다시 제모를 하고 화장을 하는 등 ‘규범에 맞는 여성적 신체로 되돌아가는’ 것. 과거에는 자연스러운 일과였던 치장이 너무 어렵다는 데 놀라는 한편, 시선과 참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에서 짧은 휴가를 얻은 기분이었다”고도 고백한다. 이 고백은 그녀의 말대로, 변형되지 않은 여성의 신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용인 불가능한 것이 되었는가에 대한 증거인 셈이다.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했던 실험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강의계획서의 몇 안 되는 여성 철학자 중 한명인 한나 아렌트의 글을 읽다가 내가 그의 글을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훨씬 비판적인 태도로 글과 상호작용하고 있었고 혹시나 논리에 허점이 없는지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평소 남성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는 철저한 반론을 제기하는 대신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잦았다. 위대한 백인 남성의 정신은 미숙한 나 따위가 생각지도 못할 방식들로 잠재적 반론을 이미 검토하고 다루었으리라 추정한 것이다.(96쪽)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저항하는 의미에서 가슴을 내놓고 다녀야 할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녀가 모인 자리에서 이 주제를 꺼낼 때면 어김없이, 혼자 잘난 줄 아는 남자 하나가 아주 재미있다는 듯 말을 보탠다. 나는 여성들도 공공장소에서 상의를 벗는 페미니스트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해! 내가 뭐 도울 일 없나? 흐흐, 기부는 어디에 하면 돼? 흐흐.(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