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이름을 함부로 짓는 부모는 어디에나 있다. 핀란드 십대 소녀 루미키도 애꿎은 피해자 중 하나로 이름의 뜻은 스노화이트, 백설공주다. 공주답게 쇼핑, 초콜릿, 거품목욕, 여성 잡지, 매니큐어 등과 친하길 바라는 엄마의 뜻과 달리 루미키는 만화책, 감초사탕, 운동, 채식 카레, 고독을 즐긴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 그런 다짐과 무관하게 루미키의 주변에는 희한하게 대형 범죄사건이 끊이지 않고, 눈썰미와 추리력, 남다른 체력과 호신술을 갖춘 덕에 늘 비자발적 오지랖의 주인공이 된다.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는 이 흥미로운 소녀 탐정 루미키 안데르손의 데뷔작 <피처럼 붉다>의 후속편으로 ‘스노화이트 삼부작’의 절정과 대미를 이룬다. 전작에서 마약조직의 피 묻은 돈에 손을 댔다 위기에 처한 급우들을 구했던 루미키는 이제 그녀 자신이 중심에 놓이는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2부 <눈처럼 희다>에서는 모처럼 떠난 프라하 여행에서 루미키의 배다른 언니라 주장하는 생면부지의 여인을 만나고, 3부 <흑단처럼 검다>에서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과거를 들먹이며 협박해오는 스토커를 추적한다. 그리고 비밀스런 개인사로부터 출발한 사건들은 약한 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사교집단, 상업주의 미디어 등 사회적 이슈로 확장된다.
<그림동화>부터 <트와일라잇>, <밀레니엄> 시리즈까지 수많은 레퍼런스들이 직간접으로 언급되지만 작가 살라 시무카의 장기는 이 모두를 전복적 서사로 꿰어내는 데 있다. 시리즈 내내 상징적으로 활용되다 <흑단처럼 검다>에서는 마침내 극중극으로 인용되는 동화에는 구원의 왕자님도 없고 뻔한 해피엔딩도 없다. 공주를 구하는 것은 공주 자신이거나 또 다른 공주여야 한다는 일관된 주제의식은 플롯으로 형상화되어 하드보일드의 마초적인 공식을 뒤집는다. 주인공과 피해자, 범인을 넘나드는 시점 이동과 복선 배치 및 회수의 재간은 탁월한 페이지터너인 본작의 원천기술. 현재 소니픽처스에서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공주를 구한 것은 왕자가 아니다
돈으로 뉴스를 만들고, 휴대전화를 해킹하고, 반항적인 기자를 해고하고, 잠복해 기다리다가 정치인들이 실수하는 순간을 냉큼 포착하고…. 그 것이 바로 치열한 언론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도가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베라 소바코바는 음모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충격적인 특종 기사와 인간적인 비극들이 터지는 타이밍이 특정 언론사들의 재정 위기와 놀라울 만큼 맞아떨어질 때가 있었다.(<눈처럼 희다>, 209쪽)
하지만 팅카의 희곡에서 의식을 되찾은 백설공주는 왕자의 신부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 그녀는 숲과 그림자와 짐승들의 친구였다. 자신의 손발 노릇을 해줄 하인들이 기다리는 황금의 성에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왕비에게는 자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왕자는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했을 뿐 그녀의 마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흑단처럼 검다>,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