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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은 책들

여성의, 여성에 의한, 그러나 모두를 위한 이야기들이다. 10월 <씨네21> 북엔즈에 꽂힌 책들은 불가해한 세상과 마주 선 지구상 여성들의 동시대를 담고 있다. 동화 속 공주이기를 거부한 핀란드 소녀는 혈혈단신으로 어른들의 거대한 범죄와 맞서 싸운다. 범죄의 칼 끝은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고 있다. 집안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에게 분노한 아일랜드의 한 여인은 18개월간 겨드랑이털을 깎지 않는 것으로 젠더 편견에 도전장을 던졌다. 대한민국의 여학생들은 오늘도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일을 해야 생계를 꾸리고 학비를 벌 수 있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그들에게 사랑은 유일한 위로이자 구원이다.

<다이버전트> 시리즈의 비어트리스 프라이어와 <헝거게임> 시리즈의 캣니스 에버딘 등 영어덜트 장르는 이미 주체적이고 당당한 십대 여전사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핀란드 동화작가 출신인 살라 시무카가 쓴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의 주인공 루미키 안데르손은 거기에 더해 기억해둘 만한 이름이다. 자신이 ‘에르큘 푸아로와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사생아’라고 시니컬하게 농담하는 이 핀란드 소녀 명탐정의 활약상은 전세계 52개국에 번역 출간되어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의 혈통을 물려받은 북구 범죄소설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

인생을 무대에 비유하는 것은 식상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지만 연극학을 가르치는 페미니스트 에머 오툴은 여성의 일생이야말로 연극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통찰한다. 가정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여성스러움을 익혀야 하는 유년기와 십대는 리허설 단계, 성장한 후에는 내면화된 젠더 규범에 맞게 분장하고, 연기하고, 대사를 읊조려야 한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은 이처럼 여성에게만 부과된 불공정한 배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연극학자의 역발상 실험일지다.

이은희의 첫 소설집 <1004번의 파르티타>는 속도의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눈을 통해 기괴한 사회구조를 응시한다. 쓰레기 줍는 할머니와 그 곁에서 길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따주는 십대 소녀, 마트에서 일하는 이십대 여성,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직장에 취업한 직장인, 군복무 시절의 악몽을 되새김하는 공시생까지. 수록된 일곱개의 단편은 문화인류학 보고서마냥 꼼꼼한 리얼리티와 자욱한 절망의 공기, 그리고 허약하지만 눈물겨운 위로를 담고 있다.

팔등신은 명함도 못 내밀 독특한 인체 비례의 캐릭터들과 함께 개성적인 만화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천계영은 환골탈태한 그림체의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의 첫 단행본을 내놓았다. 달라진 작화와 함께 새롭게 도전한 영역은 학원 순정만화의 외피를 쓴 SF 로맨스. 사랑의 감정도 스마트폰으로 확인한다는 상상력이 당대 대한민국 청춘들의 현실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