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에서 국내 최초의 국제산악영화제인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열렸다. 산악영화제라는 개념은 다소 생소해 보이지만, 여느 국가보다 아웃도어 시장이 넓고 등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한국이라면 그 미래는 꽤 낙관적이지 않을까?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엔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관객이 문전성시를 이뤘고, 산악계의 거성 라인홀트 메스너가 등장할 때마다 아이돌급의 환호성이 뒤따랐다. 물론,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의 발걸음도 이어져 23회차 상영 중 13회차의 매진을 기록했다. 전시, 도서전, 공연, 에코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도 영화제의 활기찬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중 산악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는 트리클라이밍은 기자가 직접 체험에 나섰다. 다양한 관객층과 이벤트만큼이나 게스트 라인업도 흥미로웠다. 영화제 탐방기와 함께, 산악영화감독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 중인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한 <유렉>의 파벨 비소크잔스키 감독, 국내 산악영화 사전 제작지원으로 만들어진 <미행>의 이송희일 감독과 배우 조민수와의 대화를 싣는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사인회를 하며 관객 및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가수 양희은의 <한계령>의 한 구절이다. 산은 무엇이기에 인간에게 말 없이도 위로를 건네며, 다만 한결같이, 표표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일까. 일찍이 산에 매료된 이들은 등반 과정을 영상물로 직접 기록했고, 그것은 나날이 발전해 산악다큐멘터리, 산악영화라는 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산악영화의 외연은 넓어져 자연과 그 속에서의 삶을 다룬 영화들까지 아우르고 있으며, 캐나다 밴프, 이탈리아 트렌토 등 각국 산악지대에서는 출범한 지 각각 42년, 60년이 된 유서 깊은 산악영화제들이 산악문화의 꽃을 피웠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1000m 높이의 신불산을 비롯한 7개의 산군이 모여 있는 영남알프스의 중심, 울산광역시 울주군이 국제산악영화제를 개최했다. 지난해 프레 페스티벌을 거쳐, 올해 9월30일부터 10월4일까지 닷새간 진행된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그것이다.
KTX로 세 시간을 달리고 셔틀버스를 타고 더 깊이 들어가자, 골짜기마다 아스라한 운무에 휩싸인 울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깊은 산속 마을의 정취에 취하려던 찰나, 등산복을 입은 중년 산악인들, 영화를 즐기러온 젊은이들을 비롯한 3천여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운 축제 분위기로 반전을 맞는다. 양방언 음악감독이 작곡한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배우 오정해, 김유성의 사회로 개막식이 시작됐다.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등장해 축사를 건네자 객석에서는 환호성과 박수세례가 터져나오고, 초대가수인 양희은이 <한계령>을 열창하며 비 내리는 울주의 정취를 끌어올린다. 젊은 산악인들의 패기와 열정을 담아낸 개막작 <메루> 상영 때도 대부분의 관객이 자리를 지켰다. 개막식의 열기를 이어가, 영화제는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총 21개국에서 온 78편의 작품들을 23회차로 상영했으며, 그중 13회차가 매진됐고, 야외상영장 UMFF 시네마에서 진행된 야외상영은 매일 1천석을 무리 없이 채웠다.
‘라인홀트 메스너 특강: 태산을 움직이다’ 현장. 그는 산악 인생을 통해 얻은 교훈을 자신의 등정 사진과 함께 강의했다.
밴프와 트렌토의 장점만을 취합한 듯
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는 산을 사랑하는 등산객과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데 있다. 행사장인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는 신불산 등산로 초입에 위치해, 등산을 왔다가 영화도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게 영화제쪽의 전언이다. 최선희 프로그래머는 “아웃도어 시장이 넓어지는 만큼 산악영화에 대한 수요가 생기고 있다”고 말한다. 정통 산악등반을 다룬 ‘알피니즘’, 암벽등반을 담아낸 ‘클라이밍’, 산악 스포츠를 소재로 한 ‘모험과 탐험’ 등 세개 섹션은 산악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전문적이고 다양한 산악영화들을 다룬다. 영화제는 물론, 산악영화가 낯선 관객 역시 아우른다. ‘자연과 사람’에서는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최선희 프로그래머는 “영화의 완성도와 예술성을 우선으로 하되, 산악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지닌 영화들을 선별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폴란드인 산악가 예지 쿠쿠치카의 삶을 담은 <유렉>이 대상을 수상했고, 알피니즘 작품상에 피츠로이 트레바스 초등 등반을 다룬 <어크로스 더 스카이>, 클라이밍 작품상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등정하는 <파나로마>, 모험과 탐험 작품상에 개썰매 레이서의 모습을 그려낸 <고독한 승리>, 자연과 사람 작품상에 지구 온난화 현상을 다룬 <구름 위의 사무엘>, 심사위원 특별상에 반려견과의 여행기를 다룬 <드날리>가 선정됐다. 섹션마다 다양한 색깔의 수상작이다.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012년에 밴프월드투어 상영회를 했으며, 2014년 트렌토, 밴프국제산악영화제를 견학 후 2015년 테스트베드로 프레 페스티벌을 개최한 토대 위에 만들어진 영화제다. 프레 페스티벌을 앞두고 120석 규모의 알프스시네마가 포함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가 지어졌으며, 1회 영화제를 위해선 신불산시네마, 가지산시네마라는 대형 텐트 극장이 세워졌다. 2018년에는 복합웰컴센터 부지 내 200석 규모의 극장이 더 들어설 예정이다. 울주군은 1회 영화제에 예산 20억원을 지원했다. 최선희 프로그래머는 “전세계 산악영화제들 중엔 우리 영화제 예산이 제일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울주군은 영화제를 지역 대표 문화행사로 키우려 한다. 영남알프스 홍보와 더불어 지역에 문화 인프라를 갖출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영화제는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UMFF 미디어교실을 운영 중이며, 국내 산악영화 제작 활성화를 위해 총 9천만원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울주서밋 프로젝트도 매년 진행한다. 그외에도 <라인홀트 메스너전>과 그의 특강, 도서전과 에코마켓, 공연 등 다양한 행사들이 성황리에 진행됐다. 밴프국제산악영화제를 20여년간 이끌어온 버나데트 맥도널드 심사위원장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복합 산악문화축제이자 밴프와 트렌토의 장점만을 취합한 듯한 영화제”라고 말한다. 이제 1회의 막을 내렸을 뿐이지만 밴프, 트렌토에 이어 세계 3대 산악영화제로 거듭나겠다고 선포한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야심이 미더운 까닭이다.
1천석 규모의 UMFF 야외시네마에서 매일 밤 진행된 야외상영. 영화 속 주인공이 발을 헛디딜 때는 탄식이, 등정에 성공할 때는 환호가 터져나왔다.
기자의 트리클라이밍 체험기
산악영화제를 왔으니, 산은 못 타도 산악 액티비티는 체험해봐야 인지상정이다. 기자는 로프를 이용한 나무 오르기인 트리클라이밍, 짚라인, 밧줄다리에 도전했다. 안전장비를 착용한 뒤 나무 밧줄다리 위로 발을 딛는데, 생각보다 높이가 아찔하다. 6살 이상 아이들도 재미있게 한다는 말에 두려움을 꾹 억눌렀지만, 짚라인을 타고 내려갈 때는 그만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나무 하나 오르는 것도 이렇게 무서운데, 깎아지른 암벽을 동네 뒷산처럼 오르는 영화 속 산악인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란 말인가…. 다행히, 한번 몸이 풀리니 로프를 이용한 트리클라이밍은 쉬웠다. 매듭을 묶는 요령과 팔심이 필요하지만, 나무 위까지 정복하면 타잔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거친 등정(?) 후 나무 사이에 해먹을 설치해 눕자, 낙원이 여기다. 눕자마자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몸과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하늘. 이런 맛에 산을 오르는구나 싶다. 이외에도 실내 클라이밍, 트레킹 등 다양한 액티비티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영화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것은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쏠쏠한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