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가을, 종로에서 교복 입은 여고생과 마주쳤다. 미선·효순 두 여중생의 영정을 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학생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이뿐이어서 고교 시절 입었던 옷을 애써 입고 나왔다고 했다. 교복 입은 산 언니가, 교복 입은 죽은 동생들의 얼굴을 들고 선 모습이 눈을 찔렀다. 그 옷은 말이 필요 없는 옷이었다.
2014년 가을,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대법원으로 들어가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경찰이 가로막았다. 조끼를 벗으라고 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 해고무효 등의 주장이 적힌 옷이었다. 피켓을 법정에 들고 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얘기였다. 규정이 있느냐 묻자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그 옷은 외치는 옷이었으니까.
노란색은 세월호 참사의 상징색이자 “나는 기다린다”는 호소의 언어다. 그것은 종이배였다가, 리본과 손수건이었다가, 우산이었다가 그 무엇보다 옷이었다. 유족들은 노란 옷 위에 아이의 이름을 쓰고 명찰을 달고 그리움을 담았다. 한동안 노란 리본을 달거나 옷을 입은 이들은 청와대 근처에서 무조건 검문검색의 대상이었다. 그 옷은 금지된 말이었다.
2016년 봄, 비정규노동자의 집 기금마련 전시를 관람하려던 동양시멘트 노동자들은 경찰에 에워싸인 채 전시장에 들어왔다. 관람 목적이라지만 저 건너 청와대가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무리지어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나보다.
옷 위에 말이 있었다. 용산과 세월호의 유족, 쌍용차와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입었던 상복은 그 자체로 말이었다. 누군들 그런 옷을 입고 싶으랴.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나 해야만 했기에 듣게 된 말들이 있다. 입고 싶지 않았을 것이나 입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읽게 된 옷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