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에서는 캐비닛을 가꾸는 취미가 유행이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캐비닛을 그보다 더 정교한 미니어처 조각들로 채우는 일은 귀족과 부자들이 교양과 재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거상들이 늘어나면서 사치와 투기 풍조가 만연했다. 캐비닛에는 개개인의 생활 감각이나 인생관이 담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갖고 싶어 했던 정복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영국 출신의 작가 제시 버튼은 휴가차 방문한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서 ‘미니어처 하우스’라는 전시품을 보고 작품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후 4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자리한 깊숙한 욕망을 건드리는 데뷔작 <미니어처리스트>를 완성했다.
시골 출신의 소녀 넬라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거상 요하네스와 결혼한다. 남편이 대개 부재하는 대저택에는 그녀 말고도 시누이 마린, 하인 오토와 코넬리아가 함께한다. 그들은 은밀하고 서늘한 시선으로 넬라를 시종일관 경계한다. 소외된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결혼 선물로 받은 9칸짜리 캐비닛을 꾸미는 일. 미니어처리스트에게 의뢰한 물건들이 도착하면 솜씨좋게 캐비닛을 채우는 것이다. 어느 날 넬라 앞으로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도착한다. 그 물건들이 미래를 예고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넬라는 점점 더 미니어처리스트의 예언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신분과 재력의 제약을 거스른 여자와 비밀을 품은 대저택의 인물들. 이야기의 틀은 미스터리 시대극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미니어처리스트>는 그 안을 흥미로운 사연들로 채우면서 독특한 지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작가는 데뷔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숙한 세공술을 선보인다. 각자의 사연을 담은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밀도 있게 이야기들의 꺼풀을 벗긴다. 사회적 통념과 맞물린 사연의 비극은 로맨스 소설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 넬라는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강인하고 적극적인 캐릭터로 거듭나며 소설의 묵직한 마침표를 찍는다.
정교한 공예품에 담긴 인간의 욕망
넬라는 어느새 태양 간판을 찾았다. 벽돌담에 걸린 간판에 실제로 조그만 석조 태양이 새겨져 있다. 찬란한 금빛으로 칠한,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몸체, 환한 돌의 섬광이 구체 주위에서 빛을 발산한다. 간판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넬라가 만질 수 없다. 태양 아래,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장난감으로 여긴다.(91쪽)
사람을 깊이 알게 되면요, 넬라, 달콤한 몸짓과 미소의 이면을 알게 되면, 우리 모두가 숨기고 있는 분노와 측은한 두려움을 보게 되면, 그땐 그저 용서하는 수밖엔 없어요. 용서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죠. (중략) 이 사회에는 사다리가 있고… 아그네스는 그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해요. 문제는, 아그네스가 결코 풍경을 즐길 줄 모른단 거죠.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