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은 9월11일까지 서울관 MMCA필름앤비디오 영화관에서 ‘이야기의 재건2: 던컨 캠벨, 오톨리스 그룹, 그리고 와엘 샤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4년 터너상을 수상한 던컨 캠벨, 지난해 마리오 메르츠상 수상자인 와엘 샤키, 2010년 터너상 후보에 올랐던 오톨리스 그룹의 작품 등 총 24편을 상영한다. 중앙대 공연영상창작학부 김지훈 교수가 이번에 방한한 오톨리스 그룹을 만났다. 그들이 표방하는 ‘에세이영화’라는 개념 등 미디어와 이미지를 둘러싼 시각예술의 현재와 접속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오톨리스 그룹(The Otolith Group)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이론가, 큐레이터인 코도 에슌과 안잘리카 사가가 2002년 결성한 집단이다. 이들은 시각예술에서 미학과 정치적 참여의 다양한 접속을 목표로 연구와 제작을 병행해왔으며, 외부 예술가 및 큐레이터들과 협력하여 전시기획, 영화상영 프로그래밍, 출판, 강의 퍼포먼스 등의 전방위적 활동을 유수의 미술관과 영화제에서 전개해왔다. 크리스 마르케, 하룬 파로키, 블랙 오디오 필름 컬렉티브(Black Audio Film Collective, BAFC) 등 정치적 에세이영화(essay film)를 제작한 실천가들의 작업이 이들의 활동 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호응하듯 이들은 홈페이지에서 자신들의 주요 영상작업을 에세이영화라고 명시하면서 이를 “가장 확장된 형태로 사건과 역사들을 바라보기를 추구하는 형식”이라 규정한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에세이영화는 근대적 글쓰기의 한 형태인 에세이의 특징들을 활용한 영화제작의 한 방식이다. 글쓰기로서의 에세이가 저자로서의 자아를 사적 감상과 지적 논평, 인용과 허구를 넘나들며 드러내듯 에세이영화는 촬영한 실사영상, 재활용된 기존 영상, 자막, 재연, 보이스오버 등의 다양한 시청각적 장치들로 제작자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에세이영화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실험영화와 극영화의 전략들을 결합한 장르 위반적 성격을 띤다. 이와 같은 혼종적이며 자기 반영적인 성격들은 에세이영화가 표명하는 제작자 자아를 주관성과 객관성을 넘나드는 역동적인 주체로 표현하며, 그 자아가 다루는 역사적 과거나 현재의 사건 또한 시적, 자전적 담화와 분석적 담화, 인용과 진술을 아우르는 다수의 목소리들로 재구성된다. 마르케와 파로키, 장 뤽 고다르 등의 선구적 작업들을 역사로 갖는 에세이영화는 2000년대 이후 극장과 갤러리 모두에서 재현의 불안정성을 다큐멘터리 작업의 기본 조건으로 인식하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와해시키려는 많은 작가들의 문법으로 정착했다. 오톨리스 그룹의 비디오 작품들은 이러한 문법의 동시대적 사례들이다.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이들이 제작한 ‘오톨리스 3부작’은 에세이영화의 형식적, 미학적 특징들을 풍부하게 결합하면서 20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와 SF적 미래주의 이야기를 넘나든다. <오톨리스 I>(2003)은 안잘리카 사가의 가상적 미래 후손인 인류학자 우사아데바란 사가 박사의 시점으로 호모사피엔스의 우주 거주 가능성을 상상하고, 반이라크전 시위로 촉발된 동시대의 정치적 위기에 개입하며, 냉전 이후 미•소간의 군비 경쟁이 촉발한 우주 개발의 역사를 성찰한다. 이 비선형적이며 다층적인 시간성을 구축하기 위해 오톨리스 그룹은 인도 여성 국민연합의 대표였던 사가의 할머니와 러시아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의 1973년 실제 만남에 주목하고, 이와 관련된 16mm 기록영화 장면들(인도 여성 국민연합 대표단의 구소련 방문 기록, 그리고 대규모 퍼레이드에 나타난 테레시 코바의 모습 등)을 결합하여 이야기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킨다. 서구의 기술군사적 유토피아를 응축한 우주여행의 발전사가 탈식민주의 인도의 정치적 변동과 만나고, 이 만남은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탐구하는 가상적 인류학자의 시점을 통과한다. 우주여행으로 집약되는 서구적 현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사가 박사의 내레이션은 <오톨리스 II>(2007)에서 현대 인도 도시문화의 위기, 전통적 노동집약산업과 현대적 노동조건 사이의 갈등을 겨냥한다. <오톨리스 I>에서 출발한 SF적 상상력은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오톨리스 III>(2009)에서 샤티야지트 레이의 미완성 SF영화 시나리오 <에일리언>(1967)의 허구적 리메이크로 구체화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묘사된 허구적 캐릭터들은 저작권이 적용되는 디지털 가상 환경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이 영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는데, 이는 인도의 잊혀진 과학적 상상력에 대한 재발견이자 디지털 규제와 이민자 문제라는 동시대의 기술적, 지정학적 문제들에 대한 알레고리다. 이 3부작 모두를 아우르는 SF라는 장치는 세계의 현재를 형성하는 유토피아와 그 모순들을 과거와 근미래의 시점을 통해 다층적으로 논평하려는 타임머신이다.
가상적 SF 이외에도 오톨리스 그룹의 다른 작품들 또한 오늘날의 지정학적, 과학적, 환경적, 기술적 문제들을 다룬다. <만물의 신경>(2008)은 팔레스타인 점령지구 예닌 피난민 캠프를 탐구하면서도 소수자들과 그들의 삶이 익숙한 고정관념적 이미지들(캠프, 희생자, 난민, 군인, 폭력)로 재현될 수 없다는 불투명성의 원리를 주장한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 그룹의 관심은 지구온난화, 방사선, 지진파, 산업적 하부구조 등의 비가시적 행위자들이 인간과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최근 작품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자본의 주술>(2011)에서는 디지털 기기의 원재료인 액체 크리스털이 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지각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었고, 2011년 3월에 발생한 도후쿠 대지진의 여파를 탐구한 <래디언트>(2012)에서는 실험실을 넘어 자연환경과 인공적 환경에 스며든 방사선의 영향력을 가시화하면서 핵개발과 관련된 과거의 유토피아를 비판한다. 평범한 도시와 자연적 대상의 이미지들 너머에 여전히 볼 것이 있음을 말하는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지구 영매>(2013)에서 남부 캘리포니아의 사막과 암반 이미지로 이어진다. 단층계에 기록된 지진파로만 어렴풋이 가시화될 수 있는 지질학적 변동의 오랜 역사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해온 비인간적 행위자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처럼 오톨리스 그룹은 에세이영화의 주요 특징들인 성찰적 주체성, 장르와 형식적 장치들의 역동적 조합, 주관성과 객관성을 넘나드는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통해 오늘날의 정치에 대한 미적 경험을 창조한다. 이 경험 속에서 관람자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역사와 기억, 현재와 상상적 미래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오톨리스 그룹의 작품들은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다큐멘터리를 “보다 균질적인 동시에 복잡한 픽션의 양태”라고 말한 것을 상기시킨다. “다큐멘터리가 보다 균질적인 이유는 영화를 구상한 사람이 동시에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다 복잡한 이유는 이 영화가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배열하거나 교착시키기 때문이다.” 오톨리스 그룹의 에세이영화들은 픽션의 요소들을 활성화함으로써 이미지를 뒤집어보고, 다른 이미지들과 충돌시키고, 그 이미지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놓는다. 이것은 보편적 의혹으로 빛나는 이미지들의 과잉 속에서, 이미지로 여전히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비판적 예술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