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덥더니 갑자기 시원해졌다. 새벽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법 같은 변화였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이제 보니 퍽 정확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조금 두려워졌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몇년 전부터 봄이든 가을이든 ‘지나치게’ 청명하고 쾌적한 날이면 그 날씨를 만끽하지 못하고 불안해지기 일쑤였다. 좋은 날씨가 내일이면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였다.
언제부터 현재를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일까. 혹시 대부분의 변화가 좋은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대학과 가깝다는 이유로 나는 서교동과 상수동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서교동에서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와 살았는데, 개를 데리고 짧은 산책을 다녀오신 할머니가 집 근처에 생긴 카페를 두고 길이 외져서 장사가 될까 모르겠다고 걱정하시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외졌던 길은 지금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상수동으로 이사를 갔지만, 역시 집 근처가 카페와 식당들로 유명세를 타면서 다시 이사를 나와야 했다. 여러 부동산을 전전한 끝에 망원동에서 내게 맞는 조건의 집을 딱 하나 발견했다. 망원동 집세도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그러니 그 집을 보자마자 계약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 부부 앞에서 면접을 보다시피하고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나는 2년 후를 미리부터 걱정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났다. 내가 주로 다니는 길도 제법 많이 변했다. 물론 아무 데서나 커피를 살 수 있게 된 건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조만간 계약이 만료되면 또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걱정을 누를 수는 없다. 작업실을 나누어 쓰는 친구들 대부분도 사는 지역이 어디든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 길이 빠르게 변화할수록 우리가 걱정을 주고받는 시간도 늘어난다. 우리는 감히 10년 뒤를, 미래를 예상하지 못한다. 무엇을 예상하더라도 어긋날 테니까.
오늘은 강에 갔다. 인터뷰가 있어서였다. 인터뷰어가 내게 망원유수지에 자주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강바람이 추울 정도로 시원하게 불고 있었다. 물결이 일어난 강의 수면이 보였다. 멀리 서쪽으로 건설 중인 교량이 보였다. 다리가 없던 자리에 다리가 놓이고 있었다. 짧게 지나갈 것이 분명한 요즘 날씨를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처럼 잘 즐길 수 있을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