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일본, 스무살의 야마모토 마사코는 같은 미술학교에 다니던 유학생 이중섭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이중섭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그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고향 일본을 떠나 중섭의 고향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해방에 뒤이어 찾아온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서 견뎌야 했던 마사코의 몸은 두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지경으로 쇠약해지고, 가난에 끼니 걱정까지 해야 했던 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결국 일본 고향집으로 보낸다. 상황이 좋아지면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던 희망은 이들이 나눈 200여통의 편지 속에서 슬픔으로 변해간다.
많은 부연설명을 피하기 위해 ‘이중섭의 아내’라는 안전한 제목으로 옮겨왔겠지만, 이 다큐멘터리의 방점은 한국 관객의 기대와는 다르게 화가 이중섭이 아니라 아픈 역사 속에서 짧은 사랑의 기억만으로 평생을 살아온 일본 여인 ‘남덕’(이중섭이 지어준 야마모토 마사코의 한국 이름)에 맞춰져 있다. 아흔 넘은 노인의 느린 움직임을 따라 속도를 낮춘 영화는 띄엄띄엄 이어지는 남덕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일 뿐 그녀의 삶 속에서 무리하게 ‘드라마’를 끌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가득한 그리운 남편의 편지를 읽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외롭게 작업했을 남편의 그림을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서 처음 마주할 때도 영화는 일렁이는 감정을 따라 동요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만나는 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덕의 얼굴이다. ‘재현’되지 않은 진짜 얼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서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