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EBS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가 8월22일(월)부터 28일(일)까지 일주일간 영화관과 EBS TV채널, 온라인-모바일 서비스 등 다양한 포맷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경쟁부문인 ‘페스티벌 초이스’는 영화제의 핵심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개별 작품에 관한 자세한 소개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올해는 여성감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가운데 젠더 문제를 포함해 정상성과 편견에 맞서는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여기에서 다룰 작품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감독들의 낯선 영화들이다. 세계영화제에 소개된 화제작을 국내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월드 쇼케이스’ 부문과 ‘아시아의 오늘’ 부문에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띈다. 우선 베르너 헤어초크다. <그리즐리 맨> <잊혀진 꿈의 동굴>의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은 지금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주로 잊히거나 기억에서 밀쳐진 것들을 재발견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온 그의 행보를 돌이켜볼 때 그가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처럼 현재 진행 중인 일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예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재집합>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 등을 만든 트린 T. 민하 감독이 <베트남 잊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제3세계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관해 잊지 않았던 그녀가 별안간 조국을 잊기로 한 것일까. 한편 트린 T. 민하 감독은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영화제를 찾을 예정으로, 마스터클래스 역시 계획되어 있다.
<크메르루주: 피의 기억> <잃어버린 사진>을 만든 리티 판 감독의 신작 <우리의 모국 프랑스>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의 학살로 부모를 잃고 타이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그에게 프랑스의 존재는 모국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모국 프랑스>에서 보여주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행한 식민지 정책을 기록한 아카이브 필름이다. 이 작품은 편집했다는 행위를 강조해 ‘컴필레이션 필름’이라 불리기도 한다.
잔프랑코 로시 감독은 다른 감독들에 비해 발표한 작품 수는 현저히 적지만,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면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제7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성스러운 도로>에서 로마의 외곽순환고속도로 GRA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감독은 <화염의 바다>에서 열악한 보트에 의지해 목숨을 걸고 람페두사 섬으로 건너오는 난민과 주민들의 삶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해 화제를 낳았다.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 Lo and Behold: Reveries of the Connected World
베르너 헤어초크 / 98분 / 2016년 / 월드 쇼케이스
사이버 세상은 흔히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로 이해된다. <사이버 세상에 대한 몽상>에서 이런 선입견은 초반에 깨진다. 헤어초크가 사이버 세상을 탐험하는 첫 번째 방식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다. 사이버 세상을 탐험하는 10개의 표지 중 첫 번째는 ‘초창기’로 헤어초크는 1969년 스탠퍼드 대학과 네트워킹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는 데 성공한, UCLA가 소장 중인 최초의 네트워크 컴퓨터를 찾는다. 거대하고 단단한 컴퓨터는 마치 <잊혀진 꿈의 동굴>의 신비한 동굴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헤어초크는 사이버 세상을 마냥 신비화시키지는 않는다. 특히 사이버 세상에서 한 소녀의 죽음이 소비되고 유통되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사이버 세상의 어두운 측면을 짚는다. 그 밖에도 사이버 세상과는 무관해 보이는 자연재해, 태양의 움직임, 게임 중독, 휴머노이드의 등장 등 수많은 사건이 영화에서 연결점을 그려간다. 인터넷의 탄생과 죽음, 미래를 그려나가는 와중에 인간의 삶과 죽음, 포스트 휴먼의 세계가 겹쳐지는 것은 물론이다. 훌륭한 내레이터이기도한 헤어초크의 목소리는 어쩌면 평범한 방식으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 전반에 신비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모국 프랑스> France Is Our Mother Country
리티 판 / 75분 / 2015년 / 아시아의 오늘
이 작품은 19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의 침탈을 받은 인도차이나(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의 상황을 담은 기록 영상을 활용한 푸티지영화다. 본래 프랑스 국영방송인 <FR3>의 <Docs Interdits>라는 TV시리즈 중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록 영상 사이에 중간 자막을 넣는 등 무성영화 시대의 자막 사용법을 그대로 가져온 이 작품은 가공되지 않은 파운드 푸티지의 원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리티 판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작곡가 마크 마더가 음악을 담당하고 <잃어버린 사진>에서 리티 판과 공동으로 극본 작업을 한 소설가 크리스토프 바타유가 중간 자막을 쓴, 편집되고 가공된 새로운 영상이다.
프랑스 친화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은 실은 역설적인 사용에 가깝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동양인을 백인과 흑인이 상호교배한 인종이라고 보는 서구의 인종차별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자막과 영상의 아이러니한 만남을 통해 ‘서구의 시각으로 찍은 것이 분명한 화면을 식민지 당사자의 입장에서 전유하는 것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이 영상을 보는 동안 제기된다. 우리가 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아이러니한 감정은 아마도 식민지 시절을 경험하거나 역사를 통해 간접 경험한 입장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육체에 대한 착취와 학대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너희들에게 자유와 의지를 일깨우는 중’이라고 정신적으로 세뇌하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 행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지금 이 순간에 빗대어볼 때 분명해지는 것은, 이것이 단지 제국주의적 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이라는 이름의 식민 지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케 한다는 점에서 리티 판의 푸티지는 단지 과거의 이미지가 아닌 현재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베트남 잊기> Forgetting Vietnam
트린 T. 민하 / 91분 / 2015년 / 월드 쇼케이스
리티 판 감독은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한 마스터클래스에서 다큐멘터리에 있어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기록이 있어야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트린 T. 민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베트남 잊기>를 보면 리티 판의 이 말이 다수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공유하는 감각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느껴진다. 트린 T. 민하는 40여년이 지난 베트남전쟁이 거의 기억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며, 다의적인 의미에서 베트남 잊기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의 주제적 측면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촬영된 화면 위에 삽입된 타이포그래피들이다. 이 타이포그래피는 승려 틱낫한 등 타인의 말과 글을 인용한 문장과 화자의 생각의 편린을 옮긴 듯한 짧은 어구들로 이뤄져 있다. 집필가이기도 한 감독은 인용과 자기 생각을 교차시키며 종국에는 어떤 것이 자기 생각이고 어떤 것이 인용인지를 흩뜨리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구사한다. <베트남 잊기>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이미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짧은 어구들은 SNS에서 유통되는 짧은 글 조각을 연상시킨다. 베트남에 관한 익숙한 이미지 위에 다른 이미지를 매끈하게 끼워넣거나 텍스트를 간단히 삽입하는 디지털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오늘날의 기억과 망각의 방식에 관해 사유한다.
<화염의 바다> Fire at Sea
잔프랑코 로시 / 110분 / 2015년 / 월드 쇼케이스
시칠리아 람페두사 섬에는 해마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이주해온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폭풍, 해일을 만나거나 보트 내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10분 정도의 단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홀로 람페두사 섬을 방문한 감독은 막상 현장에 도착하자 10분만 가지고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해 계획을 변경한다. 결국 작품은 장편이 되었고 체류 기간은 1년6개월로 늘어났다.
잔프랑코 로시는 무턱대고 이주민들에게 다가가거나 이들을 통해 무언가를 고발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는 내레이션과 인터뷰가 거의 배제되어 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10대 소년 사무엘레와 그의 할머니 마리아의 일상이다. 감독은 사무엘레와 친밀해질 때까지 6개 월간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의 삶에 있어 난민의 실상은 마리아가 즐겨 듣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것 같다. 주민의 삶과 난민의 삶은 느슨한 연결 관계를 갖는 것일까, 서로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기보다는 모호한 표정의 수평선 위로 관객을 던져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