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메라가 돌아가도, 꺼져도 즐거운 술자리. “이원근이 오징어 다 먹었어요.” 지윤호가 제작팀에 고자질하자, “맛있어서 그랬어”라는 이원근. “나중에 내가 하나 사줄게.” 친구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한 배종옥이 상황을 정리한다.
2. 이동은 감독과 이원근의 작전타임. “아깐 맨정신이었고, 지금은 조금 더 취한 거니까 톤을 더 높이자.” “이 대사에선 수현과 눈을 마주치는 게 나을까요, 응시하지 않고 가는 게 나을까요?” “미경이 빠지고 나서 둘은 서먹하니까 굳이 안 마주쳐도 돼.” 섬세하게 하나하나 디렉션을 주는 감독과 그 이상으로 하나하나 되짚어 묻는 배우. 이원근 배우는 “이런 방식은 처음”이라지만, 둘 사이의 소통은 편안해 보인다.
3. 저마다 각자의 상념에 잠겨 있는 용준, 수현, 미경. 담담한 시선 속 많은 감정을 감추고 있다. 이원근은 이 신에서 밀도 높은 감정 연기를 선보였다.
4. 용준(이원근)을 불러세우는 수현(지윤호). 돌아선 이도 부른 이도 마음에서 꺼내지 못한 말이 많다. 평소엔 서로 장난치기 바쁜 동갑내기 배우지만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더없이 진지해지는 그들이다.
5. <환절기>의 감성 짙은 화면의 이면엔, 좁은 집 안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스탭들이 있다! 에어컨도 틀지 못하고 무더위와 사투 중. 그럼에도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고 오손도손 친밀한 분위기다. 배우들과 스탭들도 격의 없는 사이다. <환절기>의 촬영감독이자 명필름영화학교 1기생인 이큰솔 촬영감독에게 배종옥이 “빅 브러쉬! 내 얼굴 잘 나오게 찍어봐”라고 주문하기도(‘빅 브러쉬’는 이큰솔 촬영감독의 별명이란다).
“우리 취했어.” “저 지금 모든 체력을 쏟고 있어요. 내일 죽었다.” “그게 뭐가 문제야? 지금 우린 여기에 있는데.” <환절기>의 두 배우, 배종옥과 이원근의 대화다. 풀벌레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는 한여름 밤,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의 한 단독주택에선 밤이 깊어지는 만큼 술자리도 무르익었다. 밤하늘이 쏟아질 듯한 마당의 평상에 나란히 앉은 배우들은 컷과 컷 사이 대사 같은 대화를 나누고, 카메라가 돌아가면 대화 같은 대사를 치며 배역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소주 한병 더 가져와봐 얼른. 우리 용준이가 먹고 싶대.” 배종옥이 극중 아들의 연인인 용준(이원근)을 빙자해 술 한병을 더 청한다. 제작팀이 소주를 한병 가져다주자,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이 해사하다. “오랜 요양병원 생활 후 긴장을 놓고 풀어지는 신이라 술을 마시며 연기하기로 했다”는 이동은 감독의 전언대로, 기분 좋게 살짝 취기가 오른 배우들의 모습은 더없이 친밀하고 편안해 보인다.
<환절기>는 중년 여성 미경(배종옥)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녀는 아들 수현(지윤호)만큼이나 그의 친구 용준도 아낀다. 그런데 수현과 용준이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미경은 둘 사이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의식을 잃은 수현을 꾸준히 찾아오는 용준을 지켜보는 미경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이동은 감독은 그때로부터 일정 시간이 지난 후의 모습을 그려낸 이날의 장면에 대해 “큰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감정선과 미세하게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환절기에 많이들 감기도 걸리고 크든 작든 변화를 겪지 않나. 이 영화의 인물들도 그렇기에 ‘환절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오늘의 신은 말 그대로 제목 ‘환절기’를 담아내는 장면인 셈이다. 계절과 계절을 통과하며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배우들과 디테일한 것까지 하나하나 소통했다. “앙상블로 놓고 보면, 미경이 오늘은 뭔가 놓고 싶어서 더 취한 척할 수도 있는 거고, 용준은 미경보다는 덜해야 밸런스가 맞는 거야. 용준이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해.” 차분하지만 조곤조곤 설명하는 이동은 감독의 말은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다. 마당에서 자리를 옮겨, 집 안에서 술을 마시다 미경이 잠드는 신을 촬영할 땐 미묘하게 얽혀 있던 감정선이 최고조에 이른다. “어째 왜, 너만 멀쩡한 것 같지?” 용준을 연기하는 이원근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 위로 흐르고야 만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연인.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담하고 세밀히 보여줄 <환절기>는 7월14일 여름밤의 촬영을 마지막으로 크랭크업했다. <눈발>에 이은 명필름영화학교의 2호 작품으로, 내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인물 주변의 공기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 이동은 감독 인터뷰
-정이용 그림 작가와 출간했던 그래픽 노블 <환절기>를 영화화했다.
=그래픽 노블은 가내수공업으로 하루에 한장씩 그렸는데, 영화는 많은 스탭들과 함께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여 하루에 세신 정도를 찍는다. 더 보람차고 덜 외롭다. (웃음) 많은 이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와 동시에 책임감도 느낀다. 처음엔 시나리오를 혼자 썼는데 그래픽 노블에선 정이용 작가와 둘이 됐고, 영화를 하니 스탭들이 모여 우리가 됐다. 개봉하면 더 많은 이들과 만날 수 있겠지.
-그래픽 노블과 영화로 두번 탄생한 만큼 <환절기>에 애착이 있어 보인다.
=인생에 있어 가장 추운 겨울에 쓴 작품이다. 한창 시나리오를 쓰면서 모아둔 돈도 떨어지고 인정을 못 받으니 마음에 병도 생기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도 당했다. 그때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해주기 위해 썼던 게 <환절기>다. 제작자나 투자자가 쉽게 반길 만한 소재나 내용이 아니라 일단 품어두고, 만화가를 꿈꿨던 정이용 작가를 꼬드겨 그래픽 노블로 먼저 작업했다. 가장 절박한 마음으로 썼던 <환절기>로 명필름영화학교에 지원한 셈이다.
-감독 데뷔 전엔 시네마서비스에서 일했고, 서울아트시네마와 CGV무비꼴라쥬에 몸담기도 했다.
=학부 시절 단편 <외계에서 온 17호 계획>(2002)을 만든 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지만 생계 문제 때문에 취직을 먼저 했다. 시네마서비스에서 투자팀으로, 서울아트시네마와 CGV무비꼴라쥬에서는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일도 재미있었지만 더는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창작에 전념했다. 이후 3년간 헛발질하고 방황하기도 했지만, ‘내가 어떤 이야길 할 수 있을까’, ‘내 색깔이 뭘까’ 생각해볼 수 있는 기간이었다.
-<환절기>는 아들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아들의 연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아낸다. 퀴어영화지만 연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단 가족의 시선을 통해 주변부를 아우르는 이야기라 더 매력적이다.
=표현하는 걸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는 주변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물에 돌을 던졌을 때, 돌을 보여주기보다는 수면 위에 번지는 파문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미술적, 촬영적으로도 여백이 많은 영화다. 클로즈업보다는 풀숏으로 많이 빠지고, 주변의 공기와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여백과 레이어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마지막엔 감정의 여운을 길게 주려 한다.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캐스팅 운이 좋았다. 배종옥 선배는 쿨하면서도 귀여우시고, 도회적이면서도 친근한 모습이 미경과 닮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음성 지원’이 될 만큼 말이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시고 하루 만에 하겠다고 답을 주셔서 얼마나 얼떨떨하던지. (웃음) 실제 어투와 대사 속 어투가 비슷해 대사도 고칠 필요가 없었다. 이원근은 처음 내가 갖고 있던 용준의 이미지와 달랐는데, 만나보니 배우 본인이 용준의 정서에 많이 공감하더라. 그런 면을 잘 이끌어내려고 했고, 이원근도 자신만의 장점을 살린 용준을 연기해줬다. 지윤호는 연기를 맛깔나게 해 수현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기에 적격이었다. 그래픽 노블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용준과 수현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명필름영화학교 2호 작품이다. 제작과정은 어땠나.
=영화학교 수업을 통해 많은 피드백을 받고 의견을 나눴다. 내가 창작자로서 그리는 그림과 심재명 명필름 대표가 제작자, 마케터로서 그리는 그림이 거의 일치해 초고에서 큰 수정을 거치진 않았다. 내가 가진 장점, 이 영화가 가진 미덕을 더 키워주는 방향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썼던 <환절기>가 관객에겐 어떤 위로가 될까.
=<환절기>는 주변에 있지만 나와는 조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외로움과 상처에 내 상처를 같이 포개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다. 그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내 옆 사람의, 나 자신의,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미경이였다면?’이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볼 수도 있을 테고. ‘우리’라는 울타리가 조금씩 넓어졌으면 한다.
“현장성을 중시하는 감독이라 소통이 잘됐다”- 배우 배종옥 인터뷰
-최근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다가, 간만의 영화 출연이다.
=요즘 한국영화들이 강렬하고 자극적인 데 비해 섬세한 영화가 드물다. 보고나면 ‘내가 정신없이 사느라 이런 걸 놓쳤구나’ 하고 돌아볼 수 있는 영화 말이다. <환절기>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그런 영화가 나올 것 같아 반가웠고, 이 작품으로 스크린에 복귀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아들과 그의 연인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미경을 연기하는 것은 어땠나.
=세계적 흐름으로 보면 이젠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특별한 이슈는 아니잖나. 그렇지만 정작 가족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려낸 영화는 별로 없더라. ‘내 아들이 성소수자라면’이라고 가정해보면, 사회적 이슈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텐데. 이 작품에서 아들과 그의 연인을 받아들이며 차츰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미경을 연기할 수 있어 좋았다.
-오늘 찍은 신은 어땠나.
=하이라이트다. (웃음) 감독과 나도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지 계획하지 않고, 일부러 마지막에 찍으려고 남겨뒀다. 연기를 한다는 건 현장의 분위기와 호흡을 함께 화면에 녹여내는 건데, 이동은 감독도 현장성을 중시해서 소통이 잘됐다. 편안하게 몰입해서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술도 꽤 마셨다.
-이동은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나는 신인감독들의 첫 작품이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첫 이야기에서 자기 색을 가장 잘 드러내는 법이니까. 이동은 감독은 <환절기>의 느낌 그대로를 지녔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원하는 것들을 자박자박 만들어간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 있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더라.
-명필름영화학교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신인감독, 스탭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오랜 세월 연기를 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기성 영화인이 아닌 신인들과 함께 작업하다보니 풋풋함과 열정, 신선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스탭들과 정이 들어서 헤어지는 게 아쉽다. (웃음)
“상처와 아픔을 감싸안는 사랑 이야기라 좋았다”- 배우 이원근 인터뷰
-<환절기>의 시나리오를 무척 좋게 봤다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히 메어오더라. 용준이라는 인물이 이해가 됐다. 말수가 없고, 속으론 우울함을 품고 있는 용준의 모습은 실제 내 성격과 비슷하더라. 살아오면서 인간관계에서 비슷한 경험도 겪었고. <환절기>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메마른 낙엽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상처와 아픔을 감싸안는 사랑 이야기라 좋았다. 원래 여운을 주는 잔잔한 영화를 좋아한다.
-배우 배종옥, 지윤호와의 호흡은 어땠나.
=예전에 드라마 <달래 된, 장국>에서 잠깐 뵀었는데, 그때보다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고 다시 함께 합을 맞출 수 있어서 설레더라. 영화를 찍기 전부터 선배님이 나와 배우 지윤호에게 많은 시간을 내주신 덕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떨려서 말도 섣불리 못하겠고 그랬는데, 친구처럼 대해주셔서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지윤호와는 동갑내기다보니 쉽게 친해져서 연기하기 수월했다. 게임도 같이 하는 사이다. (웃음)
-이동은 감독이 디렉션을 디테일하게 주고, 본인도 디테일하게 질문하더라.
=감독님은 점잖고 세심한 스타일이다. 말투나 센스도 좋으시고. (웃음) 그렇다보니 섬세한 감정표현이 필요할 땐 나도 하나하나 쪼개서 여쭤보고, 감독님도 쪼개서 설명해주셨다.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좋더라.
-오늘 찍은 신들은 어땠나. 술자리 신이 유독 화기애애하던데.
=원래 이 신을 찍을 때 술을 먹기로 했다. 술 마신 게 오랜만이라 좀더 마시고 싶었는데 말을 못하겠던 차에, 마침 배종옥 선배님이 더 마시자고 가져다주셔서 감사히 마셨다. (웃음)
-크랭크업한 소감이 어떤가.
=영화가 끝나 용준과 수현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게 서운하다. 작품을 하며 이런 감정이 든 건 처음인데. (웃음) 지윤호가 우스갯소리로 “나 안 보고 싶겠냐”고 하기에 “너 말고 수현이가 보고 싶을 것 같다”고 말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