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나는 아재다. 아무리 옷가게에서 허리 사이즈가 29인치라고 우겨도 육체의 주름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최신 영화 정보를 꿰고 인디 음악을 덕질해도 트로트 한 가락에 곧장 시대적 감수성이 눈물샘처럼 봉인 해제되는 나는 아재다. 자본주의 청춘신화에 결박된 채 새벽 조깅과 양파 다이어트로 뱃살과 전쟁을 벌인들 물기 머금은 청춘의 시간이 복원될 리 있겠나. 사라진 시간을 질투하는 순간, 누구나 아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재파탈’이란 최신 유행어, 그거 되게 남우세스럽다. 염치없는 말이다. 중년 남성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상품미학의 일환이라면 그저 자본의 관성이려니 하겠지만, 아재감성, 아재개그, 아재파탈로 이어지는 매스미디어의 요란한 자화자찬 북새통을 보고 있자면 모골이 다 송연할 지경이다.
애초에 ‘아재’는 ‘아저씨’를 희화화하기 위해 소환된 표현이었다. 그 저변에는 개저씨, K-저씨 같은 속어들이 매섭게 중년 남성에 대한 반감을 표상하고 있었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의 정치적 분노가 이 반감의 지층을 이루는가 하면, 권위와 여성혐오로 점철된 시대착오적인 삶의 태도가 ‘아재’와 ‘개저씨’ 같은 언어로 흠씬 조롱되고 있었다. 이것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조롱되던 아재가 ‘아재파탈’로 재빠르게 신분 세탁을 한 것이다. 자기 관리를 요청하는 차원의 유행어라면 귀엽게라도 봐주겠지만, ‘아재’로 범주화되던 재고품의 감성을 일말의 반성도 없이 몇몇 중년 미남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워 매력적인 신상품인 양 홍보하는 본새가 적잖이 고약하다.
어쩌면 ‘아재파탈’이란 말은 이미 ‘아재파탄’난 개저씨들이 ‘남성 위주의 서사’를 연장하기 위해 벌이는 최후의 안간힘에 가까울 것이다. 지난 IMF 위기 이후 ‘상처 입은 남성’의 이미지로 시작되고, ‘나쁜 남자’를 거쳐 ‘아재파탈’로 이어지는 한국 중년 남자의 저 파란만장한 신화화.‘성녀’와 ‘창녀’, ‘김치녀’와 ‘개념녀’로 분할된 채 평가 대상이 되는 한국 여성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우월한가. 90년대 잠깐 유행했던 ‘미시족’은 맞벌이와 가사노동을 겸해야 하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은폐하는 백화점의 홍보 표현이었지만 그나마 당시 페미니즘의 바람을 타고 빚어진 여성 키워드였다. 이제 그 미시족조차 사라지고, 김여사와 김치녀와 워킹맘만 달랑 남았다. 남성 지배 서사가 사회화되고 여성혐오가 팽배해진 결과다.
최근 다시 시작된 페미니즘 물결 앞에서 ‘개저씨’로 호명된 아재들이 이렇듯 ‘아재파탈’로 정신승리하는 뻔뻔함엔 자성의 표정이 없다. 유치한 동음이의어 말장난 끝에 이거 웃기지 않아? 라고 되묻는 것처럼, 나 매력적이지 않아? 라고 대답을 강요하는 무례함. 그렇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싶나? 그러면 그냥 입 닥치고 사라진 시간을 반성하는 표정을 짓는 게 낫지 싶다. 매력은 상대가 부여하는 것이지 셀프 채점해서 들이미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