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미래의 일본. 등교 거부 학생이 80만명을 헤아리고 학생 범죄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교내 폭력으로 순직한 교사는 한 해 1200명에 이른다. 정부는 청소년 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강한 성인’의 복권을 위해 신세기 교육혁명법의 하나인 ‘배틀 로얄법’을 제정한다. ‘배틀 로얄법’이란 전국의 중학교에서 3학년 학급 하나를 무작위로 뽑아 고립된 섬에 풀어놓고 사흘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살인경쟁을 시킨 뒤 살아남은 단 한 사람만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황당한 법안이다. 신인 작가 가카미 고순의 같은 제목 소설(1999)을 원작으로 한 후카사쿠 긴지(72) 감독의 <배틀 로얄>(2000)은 극단적인 설정과 청소년들의 잔인한 살해 장면 때문에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궜던 논쟁적 작품이다. 수학여행을 가던 어느 중학교 3학년 한 학급 42명이 낯선 무인도의 낡은 교사로 끌려간다. 학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장악하고 있고 전투용 헬기가 삼엄하게 하늘을 맴돈다. 몇 해 전 교실에서 학생의 칼에 허벅지를 찔린 뒤 교육현장을 떠났던 기타노 선생(기타노 다케시)이 이 잔혹한 생존 게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학생들에게는 각각 섬 지도와 간이식량과 무기가 한 가지씩 지급된다.
가장 비정한 살육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 안에 던져진 아이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친구를 죽이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하겠다는 아이도 있고, 재빨리 적응해 냉혹한 살인마로 변하는 아이도 나온다. 서로 믿을 수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불안한 미래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배틀 로얄 본부 컴퓨터의 해킹을 시도하는 아이들도 있다. 압축성장, 고도성장을 겪은 사회에서 세대와 세대 사이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기성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더 이상 어른들과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다고 단정한다. 어른들은 기성의 가치관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다음 세대와 마음을 열고 만나는 게 어떤 건지 머리에 잘 떠오르지도 않고,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방식조차 서툴기만 하다. 더 나쁜 건 강제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이들을 기성의 가치관의 틀 안에 다잡아 넣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더 나쁜 건 이런 `골보수'들이 대개 사회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기성 가치관의 국화빵 공장 같은 교실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벌이고 심지어 교사를 칼로 찌르기까지 한다. 이제 기성세대는 친위 쿠데타라도 일으켜 무력으로 학교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아이들에게 기성의 가치관을 전해줄 수단이 없다. <배틀 로얄>이 풍자한 세상은 이렇게 세대간의 소통이 완전히 끊어진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가 그 소통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놓은 건 아니다. 학생의 칼에 찔린 뒤 교단을 떠난 기타노 선생이 자기가 가르쳤던 여학생과 개울가에서 하드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에필로그는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잔상을 남긴다. 다음달 5일 개봉.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