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닉>(2015)의 주인공 데이비드(팀 로스)는 말기 환자를 돕는 호스피스 간호사다. 환자를 알선해주는 업체에 소속되어 일 하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 환자를 먹이고,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병세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죽음 이후를 다루는 장례와 관련된 많은 직업들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면, 죽음을 앞둔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직업이다. 세상 모든 일을 구조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나는 <크로닉>의 서사에서 현대 도시가 만들어내는 삶의 균열을 본다.
모두가 컨베이어 벨트의 구성원
영화를 보다보면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나 몸짓이 있을 때가 있다. <크로닉>에서 그것은 ‘기능적인’(functional)이란 단어다. 데이비드와 두 번째 환자인 존(마이클 크리스토퍼)과의 대화 중에 나온다. 데이비드는 존의 직업이 건축가임을 알고, 존에게 어떤 종류의 건물을 설계했는지를 질문한다. 이 질문에 존은 ‘기능적인’ 건물들이라 대답한다(자막은 ‘실용적인’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존이 공장이나 마트같이 기능을 우선시하는 건물을 주로 설계하는 건축가라고 생각했다. 루이스 설리번이 남긴 유명한 말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표현에서 보듯, 기능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시대의 표상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부정적인 의미를 더 갖고 있다. 지금 시대에 기능적인 건축이란 취향 없고, 특징 없는, 기능 위주로 설계된 건물을 의미한다.
건축은 구조가 정직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20세기 초의 건축가들은, 고전적인 건축 어휘를 사용해서 건물을 지으려는 시도를 비난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 건축의 아치형 천장이 석재를 쌓아서 만든 구조적 실체라면, 현대의 아치형 천장은 철골 구조 위에 석고 플라스터를 덮어서 만든 가짜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건축이론가 에드워드 R. 퍼드의 말처럼,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플라스터 아치가 벽돌 아치보다 더 현대적인 시공 방식이다. 지금 당장 우리 주변의 건물 벽을 잘라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건물 벽은 구조의 역할을 하는 콘크리트, 단열의 역할을 하는 단열재, 아름다운 표면을 위한 도장, 건물의 외관을 담당하는 외장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벽 하나를 만드는 공정도 현대사회에서는 기능에 따라 여러 분야로 구분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건축 그룹 ‘슈퍼스튜디오’가 1971년에 발표한 ‘컨베이어 벨트 도시’는 유토피아적인 도시계획 프로젝트이며, 동시에 현대사회에 대한 우화이다. 뱀처럼 선형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 도시계획안은 도시를 건설하는 ‘위대한 공장’이 앞서고, 사무실과 주거지역이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간이 지나서 폐허로 변한 지역이 뒤따르고 있다. 인구 800만명의 이 도시는, 통과하는 지역의 자원을 이용해서 도로나 건물 같은 도시의 기본 구조를 건설하고, 한 시간에 40cm의 속도로 들판과 계곡을 가로질러 쉬지 않고 전진한다. 이 도시 거주민의 삶의 목표는, 더욱 현대적인 기술로 건설될 새집으로 옮겨가는 것이고, 시민들 모두에게는 최소한 4년에 한번 새로운 집에 살 기회가 제공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꼬리에 해당하는 폐허 지역에 남겨진다. 영화 <설국열차>(2013)를 설명하는 착각이 들게 하는 이 컨베이어 벨트 도시는, 선형적인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최대의 효율을 목표로 달려가는 오늘날의 도시들을 닮아 있다.
지난 세기 초, 르코르뷔지에는 다가올 시대의 집을 ‘주거를 위한 기계’로 예상했지만, 오늘날 진정한 기계는 정교하게 작동하는 우리 시대의 도시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표준화되고 시스템화 된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의 구성원이고, 이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우리의 모든 삶을 잘게 나누어 분업화 한다. 그리고 이제는, 죽음을 앞둔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의무와 권리마저도 호스피스라 불리는 직업에 양도하였다.
이탈리아 건축 그룹 '슈퍼스튜디오'의 '컨베이어 벨트 도시'.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의 의미
존이 설계한 건물이 공장 같은 ‘기능적인’ 건물일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데이비드가 찾아간 존의 건물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프레리 스타일을 합친 것 같은, ‘현대적인’ 스타일의 개인주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건축 잡지에 나올 것 같은 현대적인 주택을 설계하는 존의 집은 장식적인 몰딩과 다양한 색상의 벽지로 치장되어 있는 고급 집장사 집에 가깝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집에는 살지 않는다는 익숙한 농담처럼 보이는 이 상황은, 더이상 자신의 집을 자기 스스로가 짓지 않게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생겨나는 균열, 직업으로서의 건축과 생활공간으로서의 집의 불일치를 보여준다.
첫 번째 환자 새라(레이첼 피컵)의 장례식 후, 데이비드가 바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옆 좌석에 앉은 커플과의 대화중에, 데이비드는 죽은 새라가 자신의 부인이었고,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서 돌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거짓말은, 데이비드가 두 번째 환자 존이 설계한 건물을 찾아가고, 존과 어떤 관계인지 묻는 건물 주인에게, 자신이 존의 동생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통해서 반복된다. 영화에서 이러한 거짓말은 데이비드가 환자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간호를 제공하고, 제공한 일에 대한 등가치로서 비용을 지불받는 사회적 계약관계에, 데이비드는 가족의 감정을 대입하고 있다(과거에 데이비드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이 관계에 대한 혼란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호스피스 간호사가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와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때 발생 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가족을 잃은 끔찍한 경험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는 데 있다.
영화는 평화로운 주택가를 조깅하던 데이비드가 갑자기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서 끝이 난다. 이 사고는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극장 안의 관객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다. 횡단보도 앞, 달려오는 차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데이비드는 달리기를 계속하고, 그때 갑자기 자동차가 나타나 강한 충돌음과 함께 데이비드를 화면 밖으로 끌고 가버린다. 데이비드가 사라진 도로 위로 밀리는 차들과 빨간색 정지신호등이 보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자막이 오르는 스크린을 뒤로한 채 극장 문을 나섰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우아한 통찰’을 보여준다던 영화가, 호러영화처럼 관객을 깜작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끝이 난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관을 나서며 나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고로 영화가 끝나는 것이 가능한 지를.
크로닉(chronic)의 의미는 만성적인, 즉 오래 지속되고 반복되는 고통이다. 환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데이비드에게 환자의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만성적인 고통이다. 무언가가 만성적인 것으로 변했을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굳건한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다. 죽음과 가까웠던 데이비드에게 그것은, 부주의와 유혹의 경계 사이에 서 있는 어떤 것, 찰나의 선택이다. 데이비드는 달리던 관성과 피로와 유혹에 의해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영화가 사고를 보여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사고는 갑작스럽고, 예상할 수 없고, 놀라게 한다. 그렇게 <크로닉>은 사고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