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상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24일 열린 74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사회자인 우피 골드버그가 영화계를 “진흙탕 싸움”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아카데미상은 엄청난 홍보 물량경쟁과 로비로 얼룩져 있는 데다 위원회 스스로 미국과 가족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영화를 선호해 `정치판'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흑인배우 시드니 포이티어의 공로상에 이어 할 베리와 덴절 워싱턴이 차례로 주연상으로 호명되자, 우스개 표현을 빌자면 머리 한 구석에서 “이거 진짜 할리우드 액션(오!노!) 아냐?”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물론 그들은 정말 상을 탈 만한 배우였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보여준 일방주의 정책으로 전세계의 비난을 받는 미국으로선, 미국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정말 `감동적'인 순간으로 연출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빨갱이' 딱지를 붙여 자신들이 쫓아냈던 찰리 채플린에게 몇십 년만에 공로상으로 화해의 몸짓을 보냈던 기억도 떠올랐다. 다른 분야와 달리 할리우드에서 만큼은 흑인들이 인정받지 못해왔고, 특히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유독 그들에게 인색했다. 워싱턴에게 주연상을 안긴 <트레이닝 데이>의 감독 안톤 푸쿠아가 흑인이긴 하지만, 아직도 미국 감독협회에서 흑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의 비율은 7.7%에 불과하다. 이날 밤 직전까지 아카데미에서 상을 탄 흑인 배우는 주·조연을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시상식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할리우드가 `이 역사적인 밤의 의미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는 기사를 전했다. 흑인 감독인 스파이크 리는 “할리우드로선 등을 두드리며 그래, 이걸로 한동안은 그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겠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날 밤 느낀 흥분은 40년 전 포이티어가 주연상을 탔을 때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앞으로 또 40년을 기다리지 않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에는 “마치 붕대감듯 몇몇 상징적 행동으로 한 사회가 저지른 잘못을 바꾸거나 옛날로 돌아갈 순 없다”는 어느 제작자의 말이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평가절하'를 해도, 지난 24일밤 할리우드에 미세한 균열이 시작됐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베리는 “지금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어린 흑인소녀들이 불가능한 건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고, 이것이 우리 사회 인식의 경계를 넓혀줄 것”이라 말했다. 최근 거대 회사인 AOL 타임 워너의 차기사장으로 흑인인 리처드 파슨스가 임명된 것도 긍정적 신호다. 우연의 일치였든, 어떤 정치적 이유에서였든 이제 카메라는 더 많은 흑인들을 알아볼 것이다. 히스패닉이나 아시아계가 기다릴 시간은 흑인들의 그것 보다는 좀 더 단축되리라. 이 정도면 `기분 나쁘지 않은' 할리우드 액션 아닐까. 김영희 기자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