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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류성희의 <엘리펀트 맨> 이것이 연출이구나
류성희(미술감독) 2016-06-29

류성희 미술감독(<아가씨> <올드보이>)

<엘리펀트 맨>

아무리 여러 번 보아도 나를 울게 만드는 사춘기 영화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엘리펀트 맨>(1980)은 지금도 꼭 혼자서만 본다. 신파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이 영화 앞에선 맥을 못 추고 눈물을 쏟아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당시 나는 아직 진로에 대한 정확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막연히 미술대학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입시 실기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주변의 만류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입시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음악과 영화만이 유일한 도피처였던 그 시절,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보기도 어려웠던 때라 온 가족이 모여 보는 TV 명화극장이 낙이었는데, 아마도 그날은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었나 보다. 동생들에게는 오랫동안 돈을 모아 어렵게 구한 핑크 플로이드의 중고 원판 음반을 던져놓았다. 내 여형제들은 모두 당시에는 드물었던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록의 광팬이었다. 그날은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온전히 내 차지가 된 거실, 잔뜩 기대했던 스펙터클하거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화면의 영화가 아니라 제목도 뭔가 이상하고 게다가 곰팡이가 필 것 같은 질감의 흑백영화가 방영됐다. 금방이라도 채널을 돌릴 태세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선명한 오프닝 시퀀스가 그때까지 본 영화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어둡고 그로테스크했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과 확대된 코끼리, 기계소리 같은 괴성의 사운드로 가득했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해 왔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초반의 괴이한 분위기를 버텨냈고 시작한 지 5분도 채 지나기 전에 난 완전히 화면에 압도되었다. 철창 속에 갇힌 엘리펀트 맨, 서커스단의 천막과 천박하고 잔인한 대중, 기괴하게 스스로 움직이는 관절인형, 보존액 속에 담긴 기형아의 사체, 길게 난 턱수염을 만지면서 깔깔 웃어대는 왜소증 여자들 등 당시 카니발의 초현실적이면서도 야만적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들어갔다. 겁 많은 소녀였던 내가 이 낯설고도 불온해 보이는 불안한 이미지에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자극에 반응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취향의 발견이었던가? 아마 당시에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보여지는 세상 이미지와는 다른 이면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나 싶은데, 감독은 한동안 이 저주받은 코끼리 사나이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포와 경이에 찬 시선, 비명, 공포의 눈물을 통해 그의 얼굴을 상상하게 했다. 30분 정도 흐른 다음에야 간호사의 비명과 함께 처음으로 코끼리 인간, 존 메릭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의 모습은 그 순간까지 상상으로 쌓아왔던 이미지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기괴하고 추한 모습이었지만 놀란 간호사의 그 커다랗게 지속되는 비명은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스토리라인이나 배우들의 매력이 아니라 연출이라는, 만듦새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그를 대중에게 소개하면서 관객인 내게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방식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흉측한 모습을 가진 존 메릭은 쓰레기통의 종이들을 모아 다락방 너머로 보이는 성당을 만들고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운 대사를 이해하고 낭송한다. 어린 시절부터 차별과 학대를 받았어도 그의 고귀한 영혼을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마지막 장면, 병으로 죽어가던 존 메릭의 마지막 밤, 그는 만들어오던 근사한 종이 성당을 완성하고 “다 끝냈다”라고 말하며 ‘존 메릭’이라는 사인을 하고 처음으로 똑바로 누워서 잠이 든다. 비록 쓰레기 종이지만 손으로 작품을 만들고 자기 사인을 하는 행위가 나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우습지만 영화를 보고 난 나는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이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영감, 진지한 태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그로테스크하지만 적합한 취향까지, 모든 것이 나를 사로잡아, 보이는 것 너머로의 탐구로서 미술대학 진학을 결심하게 했고, 이후 ‘코끼리 인간 존 메릭의 종이 성당’은 끊임없이 나를 꿈을 발견하게 된 사춘기 소녀의 겸허하고 설레는 순간으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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