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세명의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내 어머니, 아내의 어머니, 한 동네 사시는 그 어머니. “모신다”는 말은 거창하고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으므로 수정한다. 어쩌다가 세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이 말도 이상하다. 바꿔 말한다. 어쩌다가 세 어머니와 만나고 있다.
사실 ‘그 어머니’를 잘 모른다.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사시는 그 어머니는, 어쩌다가 우리집 큰애와 인연을 맺는 바람에 만나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주로 그 어머니/할머니를 만난다. 나는 늦은 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다. “나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는 말이었다. 당신 얘기는 아니고, 당신의 동생에 관해 얘기하다가 결론처럼 하신 말씀이라 했다. 여러 사정 때문에 낳아준 엄마 곁을 떠나 길러준 엄마 곁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고,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뒤이은 번민과 갈등, 새롭게 싹튼 정에 관한 얘기였다. TV드라마 같지만, 그래서 평범한 얘기였고, 소박한 교훈이었다.
그 한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끝은 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 이 말씀을 읽는 방법이 여럿일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착함의 좋은 끝’을 말하였으나, 나는 ‘착함의 한계’를 생각했다. 사람의 착함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나쁨엔 한계가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건 결국 나쁜 짓이 아닐까.
악마라 불러도 좋을 자들을 볼 때마다, 저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진으로 수집해온 건 그런 ‘사람의 짓거리’였다. 정말이지, 나쁜 짓들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때론 착함을 본다. 힘겨워진다. 저 사람은, 사람이 싫어서 저러는구나. 사람됨을 거절하는구나. 곧 넘어지겠지, 결국 무너지겠지. 그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파 까무룩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