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15 <애슬립> 2015 <남자의 일생> 2014 <0.5mm> 2014 <집으로 간다> 2014 <봄을 짊어지고> 2014 <백엔의 사랑> 2013 <쿄코와 슈이치의 경우> 2012 <속죄> 2012 <아이와 마코토> 2012 <꽃잎, 춤> 2012 <가족의 나라> 2010 <겐타와 준과 가요짱의 나라> 2010 <스윗 리틀 라이즈> 2010 <거기엔 래퍼가 없다2> 2009 <구히오 대령> 2009 <죄와 벌> 2008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2008 <러브 익스포저> 2007 <아웃 오브 더 윈드>
드라마 2016 <유토리입니다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 2013 <파워 오피스걸4> 2013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013 <서점원 미치루의 신상 이야기>
<백엔의 사랑>은 현재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맞닥뜨린 청년세대의 절망과 무력감을 공유하는 영화다.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이치코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방에 틀어박혀 게임에만 몰두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N포세대, 사토리세대 등으로 불리는 청년세대의 얼굴을 대변한다. 그녀는 입 냄새가 난다는 어머니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존심을 긁는 동생과는 머리채를 잡고 식탁을 엎어버린다. 집에서 뛰쳐나온 옷차림으로 비척비척 걸어가다 길바닥에 퍽 엎어지고 마는 양은 한심스럽지만 안쓰럽다. 평범한 듯 개성 있는 외모로, 유일무이한 얼굴 같다가도 우리 모두의 얼굴 같기도 한 안도 사쿠라는 이치코에 적격이다. 어떤 역할이든 사실적인 질감의 연기로 생활의 세계에 발을 붙이는 그녀는 히키코모리 이치코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과장하거나 희화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얼굴에서 표정과 온기를 지워내며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완고히 빗장을 걸어 잠근 이치코의 모습에 접근한다. 동생과 싸우고 집을 박차고 나온 이치코는 은퇴 경기를 한 복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에게 이끌리지만, 그 역시 그녀를 쉽게 떠나가고 다시 혼자가 된 이치코는 복싱을 시작한다. 32살, 올해가 선수가 될 수 있는 마지막 해라는 나이 제한이 붙지만 이치코는 전심으로 복싱에 전념하고, 프로 시합에 출전 한다.
안도 사쿠라는 <백엔의 사랑>을 찍으면서 이치코 그 자체가 됐다. 무엇보다 신체가 그러했다. 그녀는 초반부 히키코모리 이치코를 연기하기 위해 먹고 또 먹어 체중을 늘렸고 극중 이치코가 복싱에 도전하면서부터는 급격히 살을 빼고 근육을 키웠다. 저예산영화 <백엔의 사랑>의 촬영기간이 2주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단기간 내 놀라울 정도의 극기를 발휘한 것이다. 안도 사쿠라는 “연기에 있어 육체가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고 회상한다. “이렇게까지 스스로의 육체를 마주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여배우로서 격투를 할 수 있는 작품도 드문데, 행운이었다”며 웃는 그녀다. 안도 사쿠라가 이 고생스러운 작품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복싱 시합 신이 주는 카타르시스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링 위에서 싸우는 이치코가 빛나 보이더라. 그때 이치코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벗어나 싸우는 데만 오롯이 집중한다. 나 역시 아름다움과 추함, 어떤 것도 생각지 않고 이치코가 되어 이 작품에 모든 걸 걸고 싶다고 느꼈다.” 촬영 전 3개월간의 고된 트레이닝 끝에 복싱협회의 프로 테스트 제안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키운 그녀는 대역 없이 복싱 시합신 전부를 소화했다. “단기간에 스스로의 몸과 정신에 밀접하게 다가섰다. 인간의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크더라. (웃음)”
안도 사쿠라는 혹독한 체중조절과 트레이닝으로 이치코에 다가섰지만, 현실 속 그녀와 이치코 사이의 접점은 없어 보인다. 아버지 오쿠다 에이지 감독, 어머니 배우 안도 가즈, 언니 안도 모모코 감독에 배우자인 에모토 다스쿠까지 배우인 그녀는 일본영화계의 ‘금수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연극과 영화를 접하며 자란 그녀는 데뷔 후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신인상 등을 수상했고, <가족의 나라>로 일본방송 영화예술대상 등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으며, 이번 <백엔의 사랑>에서는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및 <키네마준보> 베스트10의 여우주연상, 일본영화비평가대상 여우주연상 등을 석권한 배우다. 그런 그녀가 시합이 끝나고 돌아선 마지막 순간, “단 한번이라고 이기고 싶었다”고 울부짖는 이치코를 어떻게 체화해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것이 가장 고민스러운 지점이었다고 고백했다. “실제 나와 이치코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촬영 기간 동안 이치코의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 장면의 ‘이기고 싶었다’는 대사가 진정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더라. 현장에서도 한참이 지나고 난 어느 순간 가슴속에서 ‘이기고 싶었다’는 대사가 터져나왔다. 그 순간 이치코와 안도의 마음이 일치된 것 같다.” 언제나 이기는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안도 사쿠라의 마음 어느 틈바구니에 이치코의 대사가 숨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세상을 향해 ‘젠장!’이라고 외치는 이치코의 분한 마음”과 자신과의 닮은 구석을 찾았다. “영화인 2세라 부모의 후광으로 잘된다는 시선에는 분한 마음이 든다. 내가 절세미인이라면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을 테지만, 평범한 외모라 종종 오해를 받는다. (웃음) 그런 마음을 오히려 연기의 에너지로 삼는다.”
정작 그녀는 배우로서의 외모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예뻐 보이는 여배우를 꿈꾼 적은 한번도 없다”는 안도 사쿠라는 동양적인 선의 친근한 얼굴이지만, 뜯어보면 호선을 그리는 긴 눈매에 눈동자가 작아 무심해 보이는 삼백안을 지녔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어떻게 보면 기묘한 인상을 주는 그녀는 여성미를 강조하기보단 파격적이거나 일상적인 양극단의 역할을 소화해왔다. 소노 시온 감독의 <러브 익스포저>에서는 사이비종교의 리더 역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아이와 마코토>에서는 껌을 질겅질겅 씹는 일진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속죄>에서는 어릴 적의 트라우마로 자신을 곰이라 믿는 소녀로 분해 묘한 광기를 드러냈다. 한편 <가족의 나라>에선 양영희 감독 본인의 입장이었던 조총련 2세 여동생 역을 맡아 오빠를 북한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연기를 현실적이면서도 애틋하게 해냈고, 언니 안도 모모코 감독의<0.5mm>에서는 노인들을 돌보는 거주 간병인 역을 맡아 자연스러운 일상 연기를 선보였다. 막 종영한 드라마 <유토리입니다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에서는 남주인공보다 능력 있는 털털한 회사 동기를 거침없이 연기했다. 광기어린 연기부터 생활밀착형 연기까지, 여배우에게 주어지곤 하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역할과 연기를 선보여온 그녀도 <백엔의 사랑>을 맡기 전까지 한동안 편견에 의한 슬럼프에 빠졌었다. “이전엔 주변 사람들이 왜 못생긴 역만 맡냐는 말을 하곤 했다. 나도 하는 일이 재미없다고 느껴지고, 지금껏 해온 것처럼 연기를 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 시점에 <백엔의 사랑>은 그녀에게 전환점이 됐다. “앞도 뒤도 주변도 개의치 않고 시합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치코처럼, 나도 자신과 싸워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도 깜짝 놀라는 연기를 하자고 다짐했다. 예쁘지 않은 역만 맡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인들도 <백엔의 사랑>을 보고 내 선택을 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 (웃음)”
연기를 꿈꾸기 시작한 건 아주 어릴 적부터였다. “5살에 아버지가 출연한 연극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싶다’고 하자 어머니가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거니, 배우가 되고 싶은 거니?’라고 물으셨는데, 구체적으로 답할 수 없더라. 그저 무대가 가진 에너지에 압도당해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내 신체를 무언가를 만드는 재료로 쓰고 싶었고, 그것이 배우의 일이라는 것은 초등학생이 돼서 알았다.” 될 성부른 싹이었던 그녀는 지금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배역을 대한다. “연기를 할 때 신체, 마음, 환경에 매우 신중해진다. 제대로 살아 있어야 배역을 살아 있게 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배역에 생명을 불어넣는 동시에, 촬영현장에서 나 역시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다. 그렇기에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는 작품과 배역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건 배역에 실례되는 일이니까.” 자신을 비우며 온전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연기하는 그녀에게 아름다움과 추함은 맞닿아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못생기고 더럽게 보일까 궁리”했고, “시합에서 모든 걸 쏟아내고 아름답게 빛나는 이치코의 모습을 구현하려 노력했다”는 그녀. 링 위에 선 이치코처럼, 안도 사쿠라는 연기 인생의 매 라운드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중이다.
광기와 사랑스러움
소노 시온 감독의 에서는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의 안도 사쿠라를 만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성적 억압과 학대를 받고 자라 비뚤어진 고이케 아야는 어느날 아버지의 성기를 꺾어버린다. 사이비종교 제로 교회의 리더가 된 그녀는 참회하기 위해 죄를 짓는 유에게 동질감을 느껴 접근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동생 유코를 유혹하고, 가족들마저 장악하며 목을 조여오는 고이케 아야의 광기어린 연기는 신인 배우 안도 사쿠라의 존재감을 강렬히 각인시킬 만한 것이었다.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 피를 튀기는 안도 사쿠라는 장장 4시간의 러닝타임을 너끈히 이끌어갔고, 그녀의 잔혹하지만 싱그러운 미소는 기묘한 사랑스러움을 자아냈다. 안도 사쿠라는 이 작품으로 요코하마영화제 여우조연상과 다카사키영화제 최우수신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