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새벽, 비보가 날아들었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게이클럽에서 발생한 총기 참사 소식. 50여명이 숨지고, 53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총기 사고 중 희생자가 가장 많은 최악의 규모. 또 성소수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참극이었다. 누워 있는 시신들 사이에서 가족들의 전화 소리가 울리고, 헌혈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게이들은 헌혈 금지법 때문에 병원 앞에서 눈물을 터뜨려야 했다.
하루 전에 치러진 퀴어 퍼레이드 때문에 기쁨이 굽이치던 한국의 SNS는 이 소식에 곧장 얼어붙었다. 마음이 비탄에 허옇게 잠식됐다. 6월은 성소수자들에게 축제의 달이다. 1969년 6월28일, 뉴욕의 ‘스톤월 인’ 게이 바에서 마침내 벽장을 찢고 봉기가 일어난 것을 기념하며 전세계에서 행진과 축제가 벌어지는 기간. 하지만 난데없이 올랜드 게이 바가 피로 물들여지면서 전세계 LGBTQ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성소수자들이 최초로 자긍심을 횃불처럼 지폈던 게이 바, 서로의 안부를 토닥이고 사랑을 속삭이고 삶의 춤을 나누는 퀴어들의 요람 같은 안식처인 바로 그 게이 바가 무참히 총격당했던 것이다. 47년의 시간이 속절없이 부러지고 말았다. 아마 그게 뉴욕의 퀴어들이 지금 스톤월 인 바 앞에 눈물 같은 꽃들을 쌓아올리는 이유일 테다. 전세계 퀴어들이 비통함에 잠겨 있는 이유일 테다.
명백히 혐오 범죄다. 그 이슬람계 범인이 IS에 충성을 서약했든, 두 남성의 키스에 격분했든, 프라이드 주간에 올랜도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바를 찾아가 총을 난사하며 일으킨 학살극의 배후는 동성애 혐오다. 설령 그가 IS의 지령을 받았다고 해도, 게이들을 건물 위에서 떨어뜨려 처형하는 IS식 혐오 범죄가 미국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자명한 혐오의 문제를 슬쩍 가리며, 테러에 방점을 찍고 이슬람 혐오를 재생산하는 미국의 상당수 언론의 태도는 그래서 위험하다. 하나의 혐오를 다른 혐오로 돌려막는 것이다.
물론 한국보다는 그 사정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이트클럽’이란 표현을 써가며 게이의 존재를 아예 지워버린 한국의 언론들. 성소수자가 가시화되는 게 그토록 두려운 일인가?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무지는 그 두려움의 정점이었다. 그곳은 “성소수자 전용 클럽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민이나 우리 관광객의 출입은 거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한국인들 중엔 성소수자가 없다는 말인가? 과연, 대형 교회들이 연일 혐오의 악취를 풍기고 정치인들마저 그 기세에 편승하는 나라답다. 동성애자니까 죽어도 된다는 증오의 인터넷 댓글들이 판치는 세상답다. 어느 젊은 게이가 슬픈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만약 한국에 총기 규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애석하게도, 현재 이 질문에 대답할 자신이 없다. 가시화의 시대를 지나, 이제 혐오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관통하는 중이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이길 것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어서가 아니라 계속 실존해왔고, 앞으로도 실존할 테니까. 그게 우리가 버텨온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