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될 일이라고 했다. 나이를 먹었으니 발 뻗을 데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뜻은 고마우나 돌아가라는 얘기였다. 입이라도 맞춘 걸까. ‘두 어른’의 말씀이 같았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허나 우리 고집도 셌다. 예술이 별건가. 완고한 세상에 금을 내려는 몸부림이 예술이라면, 당신들의 삶은 온통 불순하였고, 거리에 내던진 말과 몸짓은 가히 예술적이었다. 그러니 눈 딱 감고 우리의 작가가 되어 달라. 두 어른. 어찌 모르겠는가. 빨갱이 타도와 애국결사를 외치며 버르장머리 없는 이 땅의 자식놈들에게 2만원짜리 회초리를 휘갈겨대는 어버이들의 나라에서 두분의 존재는 이미 가냘프다는 것을. 어쩌면 평생 종이호랑이였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고함이 포효가 아니었는가.
문정현은 일흔여덟살이다. 1975년 인혁당 수형자들이 사형선고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시신마저 탈취당할 때, 영구차를 가로막고 몸을 던진 젊은 사제였다. 1976년 박정희 영구집권에 반대하는 3•1구국선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늘진 땅 고통받는 이들을 예수로 섬기고, 거리를 교회로 삼아 평생을 보냈다. 매향리•대추리•용산•강정, 그의 흔적이 배지 않은 고통의 땅이 어디인가. 10년 전 즈음, 그는 칼을 들었다. 목판을 깎기 시작했다. 작품들이 쌓였다. 백기완은 여든네살이다.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 민주화운동 현장을 지켰다. 1973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1979년 계엄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노동자들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팔팔했던 1980년대나, 해고노동자의 손을 맞잡고 눈물 흘리는 노년의 2016년이나 ‘이야기꾼 백기완’의 면모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 말했다. “예수는 노동자였어. 목수였잖아. 노동으로 단련된 몸으로 부당한 사회질서에 대항한 깡다구 있는 인물이었다구.” 백기완은 붓을 들었다. 지금까지 말로 했던 것들을 한지에 옮겼다.
나와 친구들은 <두 어른>의 2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19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더 보기 싫어서, 30대 가장의 유서를 더 읽기 싫어서. 비정규노동자의 쉼터 ‘꿀잠’을 짓고 싶어서. 두 노인의 등골(서각 70여점, 붓글씨 40여점)을 빼먹었다. 갤러리 류가헌 7월5일부터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