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다시 읽으려다가 같은 책에 실린 다른 단편에 눈길이 갔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였다. 얼마 전 작가의 이름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그리고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늘 읽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대개 마구잡이로 책을 읽게 된다. 계통 없는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떤 틀이나 중심축을 바라게 된다. 지난 몇년 동안 내가 중심축으로 삼은 주제는 이동, 좀더 구체적으로는 근대를 배경으로 이동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동하는 여성 서사는 생각보다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현대가 배경이라면 사정이 조금 낫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점이 없을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제인 에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제인 에어가 비참하게 죽지 않고 이동을 종료할 수 있었던 까닭은 기본적으로 동화에서처럼 숙부의 유산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외에는… 에마 보바리는 음독자살하고, 안나 카레니나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대부분 이런 식이었으므로 내게는 자연히 수많은 여성 인물들이 이동하기는커녕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길먼의 <누런 벽지>는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그녀의 서술은 때로 중단되는데(그러면 이야기도 중단된다), 그건 남편이나 남편의 가족이 그녀의 글쓰기를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짧은 소설이지만 한두줄로 이 작품을 요약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종결부에서 누런 벽지 속의 여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른 화자는 마침내 ‘벽지 속에서 기어나온다’는 것만 말해두자. 그녀는 왜 기어가야 하는가, 어째서 그녀의 이동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나는 며칠 동안 이 소설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은,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에서 가장 멀리까지 이동한 여성 중에 나혜석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편을 따라갔지만, 그가 더 큰 세상을 보고 서양화를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강력하게 표출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렇다면 그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행려병자가 되어 무연고자 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그의 작품들은 최근까지도 철저하게 저평가되었다. 어쩌면 나혜석이 쓰고, 그리고, 말하고, 생각하고, ‘설치는’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여행기에는 여행자의 즐거움도 있지만, ‘조선 부인들’ 전반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이 깊게 배어 있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저 운이 좋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썼다.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정말로 그 이유뿐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여성에게 거창한 여행은커녕 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정도의 이동권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으니까.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범죄의 표적이 되는 사회니까. 나혜석을 ‘그녀’가 아닌 ‘그’라고 지칭하며 괴로움을 느낀다. 한국에서 여전히 ‘그’의 디폴트값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라고 썼다. ‘그’와 평등한 단어가 속히 발견되기를, 혹은 ‘그’가 어떤 성별을 가리켜도 어색하지 않은 단어가 되기를 바란다고 변명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