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Valentine’s Day Massacre 1967년, 감독 로저 코먼 출연 조지 시걸 <EBS> 3월31일(일) 낮 2시
“영화란 별게 없다. 처음과 끝이 좋으면 된다. 그외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1950년대 이후 로저 코먼 감독은 제작자 겸 감독으로 미국영화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경제성 원칙을 앞세운 철학에서 내비치듯, 로저 코먼의 영화는 싸구려 장르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배우 연기와 특수효과는 조악하고, 이야기도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을 때가 잦다. 내레이션은 그의 영화에서 ‘구원투수’ 같은데 장황하게 이야기가 벌어진다 싶으면 내레이션이 산뜻한 정리 역할을 하곤 한다. <괴물 게떼들의 공격> 등 코먼의 대표작들은 모두 재치있는 조악함의 전형이다. 그런데 이를 코먼 영화의 전부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20세기폭스와 손잡고 만든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에서 로저 코먼은 탄탄한 장르영화를 정공법으로 만들 수 있는 연출자임을 과시한다.
1920년 당시 시카고를 무대로 활약하던 알 카포네는 라이벌이었던 모렌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모렌의 밀주 공급은 같은 사업을 벌이고 있던 알 카포네에겐 적잖은 골칫거리다. ‘기관총’이라는 별명을 가진 맥건이 부하들을 모아 구체적인 방법을 모의한다. 맥건의 부하들은 모렌의 차고를 습격해 모렌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살해하고 다른 조직원들도 무참하게 학살한다.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마저 카포네의 손에 살해당하고 ‘발렌타인 데이 습격’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메이저 영화사와 타협한 결과물이지만,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은 순수한 코먼 영화다. 알 카포네의 집으로 나오는 세트는 어딘가 낯이 익다.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세트다. 미학적 판단보다 효율성을 앞세우는 건 코먼 영화의 전매특허다. 영화는 두 가지 면에서 다른 감독작들과 구분된다.
첫째, 특수효과가 볼 만하다. 갱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거리에서 요란스럽게 총을 난사하고, 사람들을 쏴죽이고 건물 한채를 통째로 박살내는 장면은 코먼의 B급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것. 어찌보면 코먼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건 다양한 시각효과의 실험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시나리오의 탄탄함이다. 1920년대에 저널리스트 경험이 있던 인물에게 시나리오를 맡긴 코먼은 당시를 생생하게 스케치할 것을 주문했다. 덕분에 알 카포네라는 캐릭터는 다른 갱스터영화 속 인물보다 실제에 근접해 있고 구체적이다. 시카고에서 활약했던 마피아들의 혈통 계보에 관한 꼼꼼한 채록은, 다른 장르영화에선 구경하기 쉽지 않다.
코먼은 갱스터의 고전을 공공연하게 인용한다. 영화에서 <인민의 적>이나 <스카페이스> 같은 걸작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은 순수하게 거리의 범죄자를 찬미하고, 그들의 영웅담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흥미로운 건, 같은 이유로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이 고전적 갱스터영화의 계보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장르영화의 신화를 탐색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